독일군에 맞서 싸운 헤헤의 군주 음크와와

원문: The genius that is Mkwawa: reclaiming Tanzania's history (2016년 5월 22일 자 The Citizen Tanzania) By Azaria Mbughuni (미국 Lane College 역사학 조교수)  

*원문을 일부 인용하여 (발) 번역함. 원문에 추가로 설명이 필요한 부분은 괄호 안에 내용 추가함.

**원문의 온라인 판을 찾지 못해 영어 원문을 공유할 수가 없음. 

***이 글은 어쩌면 민족주의나 아프리카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은, 그래서 상당히 편파적인 역사 서술일지도 모름. 그러나 식민지배 이전의 역사에 대한 글을 접하기 많이 어렵기 때문에  '이야기의 균형'을 위해 번역해 보았음. 



음크와와(Mkwawa)는 1855년 이링가(Iringa)지역의 루호타(Luhota)에서 태어났다. 그는 무니굼바(Munyibumba) 족장의 둘째 아들이었고, 족장의 풀네임은 음크와비니카 무니굼바 음와무잉가(Chief Mkwavinyika Munyigumba Mwamuyinga)였다. 그의 아들, 음크와와의 이름은 족장의 이름 무콰비니카를 줄인 이름 무크와바(Mukwava)에서 따온 이름이다. 

음크와와 초상화 ⓒMichuzi Blog


무니굼바 족장은 1860년 즈음에 100여개가 넘는 부족을 하나로 엮어 중앙집권 정부를 가진 강력한 국가를 형성하는데 성공했다. 무니굼바가 사망하자 아들 음쿠와와와 음와무밤베 사이에는 권력 쟁탈전이 일어났고, 1988년 음크와와가 승자로 결정되었다. 음크와와는 제국을 공고화하고 싶어했다. 제국의 건설 과정은 종종 피비린내나고, 상당한 노력이 들어가는 일이다. 음크와와의 지배아래있던 헤헤(Hehe) 제국도 그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적에게 상당히 무자비했다고 알려져있다.

음크와와는 19세기의 후반 동아프리카 지역에서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아프리카는 변화를 겪고 있었다. 1885년 미국에서 노예제도가 폐지되는 등 서방 세계에서 노예제가 종식되었고, 유럽인들은 아프리카와 아프리카인들을 착취할 새로운 방법을 찾고 있었다. 그리고 이미 19세기 중반부터 아프리카는 다시 유럽 이익의 중심에 놓여있었다. 1870년대 프랑스와 영국이 서아프리카에 앞다퉈 진출했고, 불황을 겪던 벨기에와 포르투갈, 그리고 독일이 '아프리카 케익'을 나눠먹길 원했다.

1870년, 풍부한 다이아몬드 광산이 남아프리카에서 발견되자 유럽인들은 더 열성적으로 아프리카에 달려들었다. 동아프리카도 고기를 찾아다니는 이 늑대무리에서 자유로울 순 없었다. 아프리카 땅을 둘러싼 쟁탈전은 1880년 중반 극에 달했다. 아프리카라는 먹음직스러운 케익을 어떻게 나눠먹을지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독일 수상 비스마르크가 베를린에서 회의를 열었는데, 막상 당사자인 아프리카의 나라들은 전혀 초대되지 않았다. 

베를린에 초대되지 못한 음크와와 같은 아프리카인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영토를 나누는 문제에 의견을 낼 수 없었다. 음크와와도 아프리카에 대해 할말이 있었을텐데 말이다. 아프리카인들 뿐 아니라 1880년대 동아프리카 해안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또 다른 외부세력인 아랍인들도 베를린에 초대받지 못했다.

유럽인들은 동아프리카에 부를 만들어 낼 수 잠재력이 풍부하다고 생각했다. 아프리카에는 아직 손타지 않은 천연자원들이 있었고. 풍부한 노동력도 있었고, 공산품을 팔기에 좋은 시장도 있었다.

한편, 사회 진화론자들이 선전하는 유사 과학은 아프리카를 뒤쳐진 사회로 묘사하며, 야만스런 아프리카인들이 공손해지기 위해선 아이들처럼 지도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에 따르면 아프리카는 아직 문명화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저명한 웨일즈출신 탐험가 헨리 모튼 스탠리(Henry Morton Stanley)는 어두운 대륙에 문명을 전파하러 가야한다고 말했다. 이런 문명화 임무의 이면에는 아프리카의 부를 침탈하려는 욕망이 숨겨져 있었다. 음크와와는 아프리카인들의 지능이 열등하다는 바로 이 인식에 도전한 것이나 다름 없었고, 그의 도전은 독일이 헤헤를 격파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도록 만들었다.

19세기 말, 음크와와와 그의 헤헤 부대는 제국 확장에 열중하고 있었다. 헤헤 제국의 남진은 거의 대등한 세력이었던 은고니(Ngoni)와 대치하기에 이르렀고, 북쪽 강력한 세력 냠웨지(Nyamwezi)는 헤헤가 더이상 북진하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었다. 이에 음크와와는 동쪽의 우사가라(Usagara, 구글 지도에 검색하면 탄자니아 서북부 므완자의 한 마을이름으로 나오는데, 여기서 말하는 우사가라는 탄자니아 동북부 지역으로 추정된다. Roscoe, J. (1921)Twenty-Five Years in East Africa)로 방향을 틀었고, 그들의 앞길을 막는 사람들은 가차없이 죽어나갔다.


20세기 초, 헤헤 전사들의 모습 ⓒWalther Dobbertin from Frankfurt University

동아프리카의 정치치형은 1880년대, 독일이 이 지역에 등장하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독일의 우수한 무기들과 아프리카 지도자들과의 동맹은 독일이 이 지역의 세력균형에 영향력을 행사 할 수 있고, 지배권을 주장할 수 있는지를 결정할 중요한 요소였다. 독일인들은 이 사실을 해안에 도착하자마자 마주하게된 부쉬리(Bushiri)의 강력한 저항을 겪고서야 배울 수 있었다. 음크와와가 부쉬리들의 저항을 도왔다고 알려져있다.

아프리카인들이 열등하다는 유럽 지식인들의 믿음은 1981년 동아프리카에서 일어난 일로 흔들리게 되었다. 독일의 동아프리카 총 사령관 에밀 폰 첼레프스키(Emil von Zelewski)는 독단적으로 헤헤 침공을 결정했는데, 첼레프스키는 오만했고, 자신의 우수한 부대에 헤헤는 적수가 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Emil von Zelewski ⓒFrankfurt University

역설적이게도 첼레프스키의 군대는 아프리카 각지에서 모인 아프리카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독일인들은 아프리카에 주둔하는 이 부대를 Kaiserliche Schutztruppe라고 불렀고, 특히 아프리카 출신 군인들을 아스카리(Askaris)라고 불렀다. (이 단어는 지금도 남아 므와나제시(Mwanajeshi)와 함께 군인을 부르는 말로 쓰이거나 음린지(Mlinzi)와 함께 경비원을 부르는 말로 쓰이고 있다.)


Schutztruppe 부대 사진. 장교는 오른쪽 사람처럼 당나귀에 타고 있다. ⓒWalther Dobbertin from Frankfurt University 

결국 헤헤와 독일의 전쟁은 아프리카인들끼리의 전쟁이라고 할 수도 있다. 아프리카인 지도자가 이끄는 아프리카인 군대 대 유럽의 이익을 위해 싸우고, 유럽인이 이끄는 아프리카인 군대의 전쟁으로 말이다. 


1891년, 첼레프스키는 300명의 아스카리와 13명의 유럽인 장교들을 이끌고 있었다. 음크와와는 1891년 8월 전투 전, 독일과의 대치상태를 외교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상당히 공을 들였다. 첼레프스키의 부대가 헤헤의 영토로 접근하자 음크와와는 협상을 위해 세명의 사자들를 보냈지만, 첼레프스키는 모두 죽였다. 여기엔 첼레프스키가 그 세사람이 사자였다는 것을 모르고 죽였다는 설도 있다. 

첼레프스키는 계속해서 헤헤 영토로 진군했고, 소총과 중화기로 무장한 그의 군인들은 마주치는 족족 마을을 불태우고 사람들을 살해했다. 독일군이 가까워지면서 음크와와의 선택지는 점점 짧아졌다. 하지만 항복은 그의 선택지에 없었기 때문에, 전쟁은 불가피해졌다. 마침내 1891년 8월, 헤헤와 독일군은 충돌했고, 이 전투는 후에 루갈로(Lugalo) 전투로 불리게 된다.

헤헤는 전투에 임할 준비가 충분히 되어있었다. 헤헤는 와한디시(Wahandisi)라는 정보원들을 활용하는 우수한 첩보 시스템를 갖추고 있어 독일군에 비해 정보력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와한디시들은 헤헤 부대에서 도보로 2-4일정도 떨어진 곳에 배치되어 정보들을 수집했다.

그리고 와다간다가(Wadagandaga)라는 정찰대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부대 근거리에 배치되어 실시간 정보들을 수집했다. 그렇게 수집된 정보들은 와한디시와 와다간다가 사이에 공유되었고 그 정보들에는 적 병력의 숫자, 무기의 종류, 주둔지, 이동경로 등이 포함되어있었다. 

이 정보수집체계를 통해 음크와와는 첼레프스키가 이링가로 진군한다는 것을 알아냈고, 충분히 대비해 나갔으며, 헤헤군의 지휘관들은 독창적인 전투계획을 수립했다. 지휘관들은 적군과 계곡에서 야전을 벌이면 불리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지형을 이용한 전략을 수립했다. 헤헤는 이링가 외곽에 위치한 험난한 언덕 지형에 병력들을 매복시켰다. 이때 헤헤의 병력은 수천에 달했고, 방패와 창, 약간의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헤헤는 루갈로에서 약 10km 떨어진, 루아하(Ruaha)강을 따라 형성된 험난한 협곡에 함정을 설치했다. 1981년 8월 17일 첼레프스키는 당나귀를 타고 그의 병력을 선두에서 이끌면서 그 협곡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헤헤의 병력들은 바위 뒤에 숨어 공격 개시 신호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매복 공격은 전광석화처럼 빨랐고, 아스카리들과 독일 장교들은 놀라서 허둥거렸다. 헤헤의 전략에 따라 아스카리들은 헤헤군과 육탄전을 치르게 되었고, 육탄전에선 그 누구도 헤헤 군인들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이 전투가 끝났을 땐, 약 64명의 아스카리들과 3명의 유럽인 장교들, 그리고 74명의 짐꾼들만이 살아 돌아갈 수 있었다. 

헤헤군의 희생은 대략 60명에서 300명으로 추정되고 있지만, 정확한 숫자는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이 전투가 독일군의 처참한 패배로 끝났다는 것이다.

첼레프스키도 이 전투에서 사망했다. 16세의(원문에는 60세로 나오지만 뒤의 문맥과 당시의 수명을 생각해보았을 때 16세가 맞는 것 같다) 헤헤 전사가 첼레프스키의 몸에 창을 찔러넣었고, 그는 그자리에서 즉사했다. 그 젊은 전사는 누구였을까? 아마 알수 없을 것이다. 그 젊은 전사는 역사를 바꾼 아프리카인들을 삼켜버리는 역사의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버렸다. 젊은 헤헤 전사는 독일의 동아프리카 총 사령관을 죽였을 뿐 아니라, 독일의 우수성에 대한 신화를 파괴했다. 루갈로 전투는 아프리카 주둔 독일군에게 역사상 최악의 패배였다.


루갈로 전투 그림 ⓒ "Le Petit Journal" #45

오만함이 첼레프스키의 전사와 루갈로 전투의 패배를 낳았다고 주장할 수 있을수도 있다.당시 독일인들은 아프리카인들이 지적으로 열등하다고 믿고 방심한 것도 있지만, 음크와와의 승리는 우연이나 독일군의 실수에서 온 것이 아니라 신중하게 수립된 계획과 훌륭한 군사 전략의 결과물이었다.

음크와와는 천재라고 불리기에 손색이 없다. 루갈로 전투는 그가 훌륭한 지휘관일 뿐만 아니라 지도자임을 보여주었다. 전투 이후, 음크와와는 루갈로 전투를 신중하게 평가하여 독일군의 강점과 헤헤군의 약점을 정확하게 파악했다. 루갈로에서 승리하긴 했지만, 근대적 무기들에 맞서 창과 방패로 무장한 헤헤군이 승리를 거두는 일은 아주 어려운 일이라는 것은 변치않는 사실이었다. 

1891년까지 헤헤 지휘관들은 독일군에게 게릴라 전술을 이용하고 있었고,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헤헤군은 병력 수와 지형에 대한 정보, 집단 기술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독일군은 강력한 무기들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그 무기들이 승리를 보장해주진 않았다. 독일군은 루갈로에서의 패배에서 헤헤군에게 승리를 거두려면 아프리카에서 가장 강력한 지배자들과 관계를 형성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배웠다.

음크와와는 승리를 거두었지만, 계속해서 싸우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독일군을 더이상 추격하진 않았다. 전투 이후 3년동안 독일군은 헤헤와의 재대결을 준비했다. 탕가니카(탄자니아 본토의 옛 이름)의 독일 총독 프라이헤르 폰 쉴러(Freiherr von Schele)는 음크와와에게 설욕하기 위한 모든 방법을 동원했다. 루갈로 전투에서 생존한 독일 장교중 한명인 톰 프린스(Tom Prince)는 정보를 수집하고 다가올 전투를 준비하기 위해 루아하 강으로 떠났다.

톰 프린스는 나중에 그의 이야기를 Gegen Araber und Wahehe (아랍과 헤헤에 대적하다)라는 제목의 책으로 냈다. 프린스는 이 지역의 지형과 정치체제에 대한 정보들을 정리했다. 그는 훗날 음크와와를 죽이고 '독일의 자존심'을 위해 복수하기위해 전력을 다했다고 기록했다. 음크와와는 '독일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던 것이다. 독일인들이 아프리카 일부를 점령하기 위해 필수적이었던 민족주의적 계획에의 핵심이 바로 그 자존심 혹은 우월함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러한 굴욕을 그냥 넘길수가 없었다. 프린스의 지휘관이었던 프라이헤르 프리드리히 폰 쉴러(Freiherr Friedrich von Schele) 대령은 1894년 10월, 헤헤를 격파하고 음크와와를 죽이기로 결정한다.



쉴러 대령의 지휘 아래 독일군은 600명이 넘는 아스카리들을 3대의 기관총과 소총들로 무장시켰다. 헤헤는 독일군의 진군을 미리 알고 있었다. 헤헤의 정보 수집 체계가 다시 한번 독일군의 움직임에 대한 정보를 보고했기 때문이다. 음크와와와 다른 헤헤 지휘관들은 이링가로 후퇴하여 거기서 일전을 준비하기로 결정한다. 음크와와는 1891년 독일군과의 전쟁이 발발하기 몇해 전에 이링가에 요새를 구축해 두고 있었다.

독일군은 이전보다 훨씬 더 잘 준비되어 있었다. 독일군의 중요한 전략 중 하나는 헤헤의 적들과 동맹을 형성하는 것이었다. 독일군은 헤헤의 적들과 동맹을 수립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상구(Sangu, 헤헤 남서쪽의 세력)의 전사들이 독일군의 헤헤 침공을 도왔다. 아주 전통적인 전략인 '나누어 지배하기(Divide and rule)'의 전형이다. 헤헤의 요새는 독일군의 소총과 기관총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이틀동안의 폭격에 뒤이어 10월 30일, 아스카리들과의 전면전이 개시되었다. 그렇게 독일은 이링가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2012년 이링가, 버스정류장. ⓒ우승훈


음크와와는 끝까지 요새 안에서 싸우길 원했지만 그의 조언자들이 그를 후퇴하도록 설득했다. 음크와와는 후퇴하여 안전한 곳에 도착하자 무너져 흐느꼈다고 전해진다. 이 패배는 그가 결국 회복하지 못한 중대한 패배가 된다. 비록 음크와와가 마지막 치명타를 맞게 되는 것은 5년 뒤이지만, 이 패배는 강력한 아프리카 지도자의 몰락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후 독일의 동아프리카 총독이 쉴러에서 헤르만 폰 비스만(Hermann von Wissman)으로 교체된다. 이링가 전투 이후 음크와와는 독일과의 직접적 충돌을 피하고 외교적 해결방안을 모색했다. 독일군 프린스 대위는 헤헤의 수도 이링가에 군사 세력을 설치하도록 지시했고, 음크와와를 권력에서 제거하려고했다

음크와와와 독일의 협상은 1895년 교착상태에 빠진다. 독일군은 초토화 계획을 실시하여 집과 밭을 태우고 헤헤의 가축들을 잡아갔다. 독일군에겐 무장한 헤헤인들을 모두 사살하라는 명령이 떨어졌고, 특히 헤헤 여성들이 중요한 목표가 되었다. 여성들은 헤헤 사회의 생존을 위해 중요했다. 여성들이 대부분의 농사일을 하고 있었는데 아스카리들이 여성들을 잡아다 가두어 버렸다. 여성들 노리기, 나누어 점령하기, 집과 밭 태우기 등의 독일군의 전략은 성공적이었다. 헤헤는 심각히 분열되기 시작했다. 음크와와는 점점 그의 사람들로부터 고립되어갔고, 음크와와의 형제, 음판기레(Mpangile)가 새로운 헤헤의 리더로 추대되었으며, 독일은 헤헤 영토의 서쪽을 상구에 넘겼다. 

음크와와와 그에게 남은 군인들은 1895년부터 1898년까지 독일에 맞서 싸웠다. 음크와와는 독일군 전초기지를 공격하고 매복한 순찰병들을 단속했다. 독일은 상구 전사들과 함께 음크와와를 목표로 수색을 벌였다. 헤헤의 수도 이링가엔 독일군이 세운 헤헤군이 음크와와에 반대하고 있었다. 독일군은 1898년 이링가의 동쪽 우중과(Uzungwa)산에서 음크와와를 찾아냈고, 음크와와는 절대로 독일군에게 생포되지 않기로 마음먹고 1989년 7월 19일, 적에게 둘러쌓인 상태에서 스스로를 쏘아 생을 마쳤다.  



음크와와의 죽음은 역사의 한 장이 끝나고, 새로운 장이 열림을 의미했다. 독일인들은 음크와와의 머리를 잘라 독일로 가져갔다. 이후 65년이 넘는 세월동안 그의 해골은 헤헤인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1918년 세계 1차 대전이 끝나자 헤헤는 탕가니카의 영국 총독부에 대표단을 보내 음크와와의 해골을 독일로 부터 받아다 달라고 부탁했다. 영국이 탕가니카를 차지한 이후 헤헤가 처음으로 한 부탁이다. 그의 해골을 돌려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헤헤에게 음크와와의 영혼이 위대한 선조들에게 돌아가지 못하고 떠돌고 있음을 의미했다.

영국은 이 부탁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해골을 돌려줘서 헤헤와 좋은 관계를 유재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영국은 1919년 베르사유 조약에 독일이 음크와와의 해골을 돌려주라는 항목을 포함시켰다. 베르사유 조약 265조에 독일이 6개월 내에 음크와와의 해골을 돌려줘야 한다는 내용이 있다. "hand over His Britannic Majesty's Goverment skull of the Sultan Mkwawa which was removed from the Protectorate of German East Africa and taken to Germany" 이에 독일은 그 해골이 독일에 없다고 주장했다. 

음크와와의 해골을 찾는 작업은 1951년 재개되었다. 당시 새롭게 부임한 탕가니카의 영국 총독 에드워드 트위닝이 1951년 9월 이링가 방문에서 헤헤 지도자 아담 사피 음크와와(Adam Sapi Mkwawa)를 만났고, 그는 음크와와의 해골을 돌려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트위닝 총독은 해골을 다시 찾으라는 명령을 내렸고, 1953년 2월, 독일 브레멘의 한 박물관에 그 유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듣게된다. 

트위닝이 이끄는 조사단은 독일로 찾아가 2,000개가 넘는 아프리카인들의 해골을 조사했고 그 중 84개가 독일 동아프리카에서 왔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 해골들은 음크와와의 가족들의 해골과 비교되었고 관자놀이에 총상이 있는 단 하나의 해골이 음크와와의 해골이라는 조건과 일치한다는 것을 찾아냈다. 트위닝의 조사단은 그 유골이 음크와와의 유골이라고 결론지었다.

돌아온 음크와와의 유골 옆에 선 아담 시피 음크와와 ⓒ National Archives (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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