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자니아는 아프리카 대륙에 동부 위치한 탕가니카(Tanganyika)와 탕가니카를 마주하고 있는 섬 잔지바(Zanzibar)가 합쳐 탄생한 연합 공화국이다. 그 중 국토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탕가니카는 영국으로부터 1961년 독립하게 되는데, 동아프리카의 영국 식민지중 가장 먼저 독립한 국가이다. 영국은 이미 세계 2차대전 직후부터 아프리카 식민지들에 자치정부를 세우고 영연방(Commonwealth)에 가입을 시키려던 계획을 가지고 있긴 했지만, 탕가니카는 영국의 계획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독립했다.
영국은 아프리카 식민지들 중 서아프리카 지역이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가장 발전되어 있었고, 중앙아프리카와 동아프리카는 상대적으로 저개발되었다고 판단하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1950년대 탕가니카는 영국이 동아프리카에 가지고 있던 식민지들 중 가장 낙후된 지역이었다. 서아프리카에서 가나가 가장 먼저 독립(1957년)했던 것 처럼, 영국의 계획대로라면 탕가니카는 동아프리카 식민지들 중 가장 마지막에 독립되어야 했다. 하지만 재미있게도 탕가니카는 동아프리카 영국 식민지들 중 가장 먼저 독립한 나라가 된다.
탕가니카의 어떻게 보면 갑작스러운 독립에 대해 아프리카 역사 교수인 존 일리페는 4가지 설명을 내놓는다.
첫번째 이유로 일리페는 탕가니카에 견고한 정치 기구가 없어서 당시 총독이던 에드워드 트위닝(Edward Twining)이 새로운 선거 체제를 도입하도록 했던 것이 이 모든 사태의 출발이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참고로 에드워드 트위닝은 유명한 차(Tea) 브랜드 트위닝스(Twinings)를 소유한 가문의 일원이다.
트위닝 총독이 제안했던 선거 체제는 앞으로 탕가니카가 다인종(Multi-racial)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기초하고 있었다. 이 선거 체제는 유럽인-아프리카인-아시아인(당시 탕가니카엔 많은 인도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의 3인종 구도로 정부를 구성하는 것을 목표하고 있었는데, 아프리카인들이 압도적으로 많은 탕가니카에 이런 정부를 구성하자는 것은 외부인들의 특권을 지키겠다는 의도가 너무나 뻔했고, 결국 아프리카 국민주의(African Nationalism) 운동이 탕가니카에서 힘을 얻도록 하는 구실을 제공했다.
당시 탕가니카에서의 아프리카 국민주의 운동은 탕가니카 아프리카인 협회(Tanganyika African Association, TAA)가 주도했다. 트위닝 총독의 제안으로 시작된 아프리카인들의 참정권을 둘러싼 토론 과정에 TAA는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아프리카인들을 동원하여 정치적 세력을 키워 탕가니카 아프리카 국민 연합(Tanganyika African National Union, TANU)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TANU와 TANU를 이끄는 줄리어스 녜레레(Julius Nyerere)는 총독의 다인종 정책를 거부하고 탕가니카가 '아프리카인들의 나라'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Nyerere와 TAA: 녜레레는 1953년 TAA의 협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이는 탕가니카인 최초로 영국 대학교(University of Edinburgh, MA in Economics and History)에서 공부하고 1952년 석사학위를 취득한 바로 다음해였다. 영국으로 가기 전 녜레레는 우간다 캄팔라의 마케레레 대학교(Makerere University)에서 교육학 학위를 받았는데, 여기서 공부할 당시 그는 탕가니카 학생들의 복지와 교류를 위해 Tanganyika Welfare Association를 설립했었고, 이후 이 협회는 TAA과 통합된다.
두번째 이유는 TANU의 성장과 관련이 깊다. 1958-59년 탕가니카에선 상원의원을 뽑는 첫번째 선거가 열리게 된다. 이 선거에서 몇몇 당이 TANU와 경쟁하려고 나섰지만, 결과는 TANU의 압도적인 승리였다. TANU와 경쟁했던 정당은 UTP(United Tanganyika Party 통합 탕가니카 당), ANC(African National Congress 아프리카 민족 회의) 등이었으나 그 조직력과 당 이념적 측면에서 TANU와 상대가 되지 않았다. 아프리카인들이 식민주의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고, 독립을 코앞에 둔 탕가니카의 상황에 아프리카 국민주의 외에 다른 이념은 선거에 도움이 되지 않았고, 이미 그 이념은 아프리카 국민주의 운동에서 출발한 TANU가 선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UTP같은 경우엔 정당 조직은 꽤 갖추었으나, 식민정부의 다인종 정책에 찬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중에게 외면당했다. 또한 저개발된 탕가니카에서 정치에 뜻이 있는 사람들은 TANU만으로도 충분히 다 수용될 수 있었기에 다른 당의 필요성은 더욱 적었다.
세번째 이유는 탕가니카의 안보 기구가 아프리카 국민주의 운동을 제어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네번째 이유는 탕가니카는 이미 너무 저개발 상태였기 때문에 천문학적인 비용과 시간이 드는 개발을 위해 독립을 늦춘다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 상태다는 것이다.
1958-59 선거에서 대승을 거둔 TANU는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영향력을 키워갔고, 독립 되기 전인 1961년 5월, 완전한 자치정부를 구성했으며 1961년 12월 9일 마침내 영국으로부터 독립했다.
독립 다음 해 치러진 첫번째 대통령 선거에서 TANU의 녜레레가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당선되었고, 야당은 정말 유명무실해졌다. 1964년 탕가니카와 잔지바가 연합을 이루어 탄자니아를 탄생시켰고, 그 다음해 탄자니아는 공식적으로 일당체제 국가로 전환한다. 1992년 다당제가 재도입되기 전까지 약 27년동안 탄자니아는 TANU, 그리고 잔지바의 ASP(Afro-Shirazi Party, 아프로-쉬라지 당)와의 합당으로 탄생한 CCM이 여당이자 정부의 역할을 하는 '당-국가 체제'를 유지한다.
1992년 다당제가 도입되고, 1995년부터 2015년까지 5번의 다당제 선거를 치렀지만 여당은 한번도 바뀌지 않았고, 국회에서의 압도적 우위도 계속해서 유지되고 있다. 첫번째 다당제 체제(1958-64)에서 야당이 성공적으로 자리잡지 못했고, 독립 직후 오랜기간 일당체제가 이어졌기 때문에 야당이 여당과 정부를 실질적으로 견제하거나 정권교체를 이뤄내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 덧
본문 속 마지막 사진, 독립을 기념하며 독립 전날 킬리만자로 정상에 '자유의 횃불(Uhuru Torch)'을 전달한 Alexander Nyirenda 중위의 모습이 인상깊다. 당시 킬리만자로 정상은 독일의 '빌헬름 황제'의 이름을 따서 Kaiser Wilhelm Peak으로 불리고 있었는데, 1889년 독일인 한스 마이어가 정상에 오르고 그렇게 이름 붙였기 때문이다. 지금 킬리만자로 정상은 Uhuru Peak로 불리고 있는데, 이 횃불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후루(Uhuru)는 스와힐리어로 '자유'를 뜻한다.
이와 관련해서 녜레레는 1959년 이미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2013년 우후루 피크에 올랐을 때 이 이야기를 알고 있었더라면 훨씬 더 큰 감동이 몰려왔을 것 같다.
영국은 아프리카 식민지들 중 서아프리카 지역이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가장 발전되어 있었고, 중앙아프리카와 동아프리카는 상대적으로 저개발되었다고 판단하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1950년대 탕가니카는 영국이 동아프리카에 가지고 있던 식민지들 중 가장 낙후된 지역이었다. 서아프리카에서 가나가 가장 먼저 독립(1957년)했던 것 처럼, 영국의 계획대로라면 탕가니카는 동아프리카 식민지들 중 가장 마지막에 독립되어야 했다. 하지만 재미있게도 탕가니카는 동아프리카 영국 식민지들 중 가장 먼저 독립한 나라가 된다.
독립의 기쁨을 표현하고 있는 당시 국무총리었던 녜레레. Photo: Tanzanian Affairs |
탕가니카의 어떻게 보면 갑작스러운 독립에 대해 아프리카 역사 교수인 존 일리페는 4가지 설명을 내놓는다.
첫번째 이유로 일리페는 탕가니카에 견고한 정치 기구가 없어서 당시 총독이던 에드워드 트위닝(Edward Twining)이 새로운 선거 체제를 도입하도록 했던 것이 이 모든 사태의 출발이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참고로 에드워드 트위닝은 유명한 차(Tea) 브랜드 트위닝스(Twinings)를 소유한 가문의 일원이다.
트위닝스의 잉글리시 브랙퍼스트 티 Photo: Twinings |
* Nationalism: 우리나라에선 보통 '민족주의'라고 번역되고 있는데, 다민족으로 구성된 아프리카 국가들의 사례에선 '국민주의'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생각한다. 독립과정에서 아프리카의 지도자들은 국경선 안에 함께 살고 있는 다양한 민족의 사람들에게 '국민'이란 인식을 심으려고 노력했다. 아프리카 국민주의 운동은 외세(주로 식민 종주국)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 자신들의 나라를, 나아가 아프리카 대륙을 아프리카인들 스스로 다스리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Nyerere와 TAA: 녜레레는 1953년 TAA의 협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이는 탕가니카인 최초로 영국 대학교(University of Edinburgh, MA in Economics and History)에서 공부하고 1952년 석사학위를 취득한 바로 다음해였다. 영국으로 가기 전 녜레레는 우간다 캄팔라의 마케레레 대학교(Makerere University)에서 교육학 학위를 받았는데, 여기서 공부할 당시 그는 탕가니카 학생들의 복지와 교류를 위해 Tanganyika Welfare Association를 설립했었고, 이후 이 협회는 TAA과 통합된다.
두번째 이유는 TANU의 성장과 관련이 깊다. 1958-59년 탕가니카에선 상원의원을 뽑는 첫번째 선거가 열리게 된다. 이 선거에서 몇몇 당이 TANU와 경쟁하려고 나섰지만, 결과는 TANU의 압도적인 승리였다. TANU와 경쟁했던 정당은 UTP(United Tanganyika Party 통합 탕가니카 당), ANC(African National Congress 아프리카 민족 회의) 등이었으나 그 조직력과 당 이념적 측면에서 TANU와 상대가 되지 않았다. 아프리카인들이 식민주의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고, 독립을 코앞에 둔 탕가니카의 상황에 아프리카 국민주의 외에 다른 이념은 선거에 도움이 되지 않았고, 이미 그 이념은 아프리카 국민주의 운동에서 출발한 TANU가 선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UTP같은 경우엔 정당 조직은 꽤 갖추었으나, 식민정부의 다인종 정책에 찬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중에게 외면당했다. 또한 저개발된 탕가니카에서 정치에 뜻이 있는 사람들은 TANU만으로도 충분히 다 수용될 수 있었기에 다른 당의 필요성은 더욱 적었다.
세번째 이유는 탕가니카의 안보 기구가 아프리카 국민주의 운동을 제어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네번째 이유는 탕가니카는 이미 너무 저개발 상태였기 때문에 천문학적인 비용과 시간이 드는 개발을 위해 독립을 늦춘다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 상태다는 것이다.
자유의 횃불을 킬리만자로 정상까지 전달한 Alexander Nyirenda 중위 Photo: Tanzanian Affairs |
1958-59 선거에서 대승을 거둔 TANU는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영향력을 키워갔고, 독립 되기 전인 1961년 5월, 완전한 자치정부를 구성했으며 1961년 12월 9일 마침내 영국으로부터 독립했다.
독립 다음 해 치러진 첫번째 대통령 선거에서 TANU의 녜레레가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당선되었고, 야당은 정말 유명무실해졌다. 1964년 탕가니카와 잔지바가 연합을 이루어 탄자니아를 탄생시켰고, 그 다음해 탄자니아는 공식적으로 일당체제 국가로 전환한다. 1992년 다당제가 재도입되기 전까지 약 27년동안 탄자니아는 TANU, 그리고 잔지바의 ASP(Afro-Shirazi Party, 아프로-쉬라지 당)와의 합당으로 탄생한 CCM이 여당이자 정부의 역할을 하는 '당-국가 체제'를 유지한다.
1992년 다당제가 도입되고, 1995년부터 2015년까지 5번의 다당제 선거를 치렀지만 여당은 한번도 바뀌지 않았고, 국회에서의 압도적 우위도 계속해서 유지되고 있다. 첫번째 다당제 체제(1958-64)에서 야당이 성공적으로 자리잡지 못했고, 독립 직후 오랜기간 일당체제가 이어졌기 때문에 야당이 여당과 정부를 실질적으로 견제하거나 정권교체를 이뤄내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 덧
본문 속 마지막 사진, 독립을 기념하며 독립 전날 킬리만자로 정상에 '자유의 횃불(Uhuru Torch)'을 전달한 Alexander Nyirenda 중위의 모습이 인상깊다. 당시 킬리만자로 정상은 독일의 '빌헬름 황제'의 이름을 따서 Kaiser Wilhelm Peak으로 불리고 있었는데, 1889년 독일인 한스 마이어가 정상에 오르고 그렇게 이름 붙였기 때문이다. 지금 킬리만자로 정상은 Uhuru Peak로 불리고 있는데, 이 횃불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후루(Uhuru)는 스와힐리어로 '자유'를 뜻한다.
이와 관련해서 녜레레는 1959년 이미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우리 탕가니카인들은 킬리만자로 정상에 촛불을 밝혀, 절망이 있는 곳엔 희망을, 증오가 있는 곳엔 사랑을, 굴욕만이 있는 곳엔 존엄성을 전하는 빛을 국경 넘어까지 비추려 합니다."
"We, the people of Tanganyika, would like to light a candle and put it on the top of Mount Kilimanjaro which would shine beyond our borders giving hope where there was despair, love where there was hate and dignity where there was before only humiliation."
2013년 우후루 피크에 올랐을 때 이 이야기를 알고 있었더라면 훨씬 더 큰 감동이 몰려왔을 것 같다.
2013년 우후루 피크에 올랐을 때의 사진. 좌측이 나. 가운데는 탄자니아 전문 여행사 Jay's Adventure의 제이 사장님. |
<참고자료>
Iliffe, J. (2005) Breaking the Chain at its Weakest Link: TANU and the Colonial Office. In Maddox, G. and Giblin, J. (editors) In Search of a Nation: Histories of Authority and Dissidence in Tanzania. Suffolk: Boydell & Brewer. 168-197.
Brennan, J. (2005) The Short History of Political Opposition and Multi-Party Democracy in Tanganyika 1958-64. In Maddox, G. and Giblin, J. (editors) In Search of a Nation: Histories of Authority and Dissidence in Tanzania. Suffolk: Boydell & Brewer. 250-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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