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영국/벨기에/포르투갈의 식민 정책과 실제


1880년대부터 1910년대까지 이어졌던 아프리카 쟁탈전, 그 시기에 아프리카에 그 어느나라보다도 열심히 손을 뻗었던 나라들의 식민정책과 실제를 잘 정리해둔 내용이 있어서 한글로 번역/요약 해보았다.

참고자료: Poku, N and Mdee, A. (2011) Politics in Africa: a New Introduction.  



프랑스 식민 정책과 실제

프랑스 식민지는 행정부의 단일화를 그 특징으로 하고 정책은 정체성과 보호주의와 관련이 있었다. 프랑스 혁명의 전통의 영향을 받아 '피부색과 상관 없이 프랑스 식민 영토에 사는 모든 사람은 프랑스 인이며, 헌법에 정하는 권리를 인정받는다(1792년 아프리카 노예제 폐지 포고문)'는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식민지 사람들도 파리 국회에 보낼 자신들의 대표를 선출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고, 어느정도의 자치도 허용 되었으며, 프랑스어로 무상 교육이 제공되었다. 하지만 이 정책은 19세기 후반 보호주의로 대체된다.

보호주의는 보수적이고 둑재적이었다. 프랑스 혁명의 정신은 약화되었고, 프랑스의 제국적 확장 욕망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프랑스의 영향권에 있던 북아프리카, 서아프리카, 그리고 적도 아프리카 지역의 사람들은 시민이 아닌 통치의 대상으로 전락했고, 더 이상 정치에 참여할 수 없게 되었다. 이렇게 차별없는 보편적 시민권의 이상을 가지고 시작되었던 프랑스의 식민정책은 인종차별주의로 변질되었고,  아프리카인들의 대표는 있었지만 실질적으로 정책결정에 참여할 수 없었고, 아프리카인들을 위한 교육도 크게 발전하지 않았다. 이 모든 것들은 소득과 착취적 경제 구조속의 기회 불균형으로 강화되었다.


1884년 베를린 회의 이후 아프리카 대륙의 식민지 지도. 출처: History Link 101

영국 식민 정책과 실제

프랑스의 식민 정책과는 반대로, 영국의 식민지 정책은 분열주의적이었다. 영국의 식민정책은 '간접 지배'를 통한 보호주의였는데, 이 모델은 세계 2차 대전 이후, 서서히 대의 민주주의로 변했다. 대의 민주주의 체제 아래서 영국은 '전통'의 권위에 맞서기 위해 소수의 교육받은 엘리트들을 지원했다. 동아프리카에선 인종, 즉 백인, 인도인, 아프리카인이 바로 계층이 되었다.

영국 식민 정책은 자유주의적 발상인 권력의 이전, 의회, 아프리카 '부족장'들을 이용한 간접 통치, 지도자들을 위한 엘리트 교육 등을 추진했으나 실상은 동아프리카와 중앙아프리카에선 아프리카인들이 정치에서 배제되었고, 전통적 권위의 약화와 함께 영국으로부터 배제당한 교육받은 아프리카인 엘리트들이 부상해 결국 독립운동의 중심 세력이 되었다.



벨기에 식민 정책의 이상과 실제

표면적으로 벨기에는 식민지에서 칼뱅주의적 가치를 강조했다. 비 인종적인 협력이란 원칙 아래서 아프리카인들은 중산층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등장한 새로운 아프리카 중간 계급에게 정치적 표현의 수단은 주어지지 않았고, 노동조합이나 시민권도 보장되지 않았다. 킴방기즘(Kimbangism)같은 자생적 분파가 등장하여 기존 교회들의 권위에 도전하는가 하면 엘리트들은 더 높은 수준의 교육을 요구했고, 분리주의의 목소리도 갈수록 높아졌다.



포르투갈 식민 정책과 실제

다른나라의 식민지들과 달리 포르투갈 식민지는 제대로 발달하지 못했다.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식민지들의 아프리카인들을 '문명화'하기 위해 가톨릭으로 개종하게 하고, 포르투갈 문화를 받아들이도록 했다. 이렇게 '문명화'과정을 거친 아프리카인들은 식민 정부로부터 '문명화된 사람'이라는 증명서를 받을 수 있었고, 그들은 백인 포르투갈인들이 가지는 권리와 의무를 똑같이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문명화된 사람'은 극히 소수에 그쳤고, 대다수 관습의 지배 아래 지내던 아프리카인들은 식민 정부의 수입을 위한 노동에 동원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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