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냐 사람이라는 것의 의미? / What does it mean to be Kenyan? - Nic Cheeseman & Wambui Wamae Kamiru

한국 사람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한국에서 태어난다는 것? 한국어를 할 줄 안다는것? 그게 뭔지는 말하기 어렵긴 하지만 여튼 '한국 문화'를 이해한다는 것? 독립투사들의 이름을 외운다는 것? 아주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과연 누군가의 정체성을 완전히 이해한다는게 가능하기나 한지 의심이 들긴 하지만, 한 개인과 사회의 정체성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항상 흥미롭다. 언제든 나 자신을 탐구대상으로 삼을 수 있고, 내 주변사람들을 대상으로 삼을 수 있기 때문에 평생 취미로 삼아도 좋을 정도라고 생각한다. 나 자신부터 시작해서 여러가지 정체성에 대해 궁금하지만, 가장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프리카 사람'이라는 정체성이다. 최근엔 '아프리카'라는 분류에 너무 많은 것을 집어넣고 있다며, 더 작은 단위로 잘게 나누어(예를들면 국가단위 혹은 언어권 단위로) 다루는 경향이 많이 보이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아프리카 여러 나라 출신의 친구들을 보면 '아프리카 사람'이라는 정체성은 분명 존재하는 것 처럼 보인다. '아프리카 사람'을 뭐라 정의하거나 설명할 수 있을지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케냐 신문 Daily Nation에 실린 케냐 사람이라는 것의 의미? (What does it mean to be Kenyan?) 라는 글에서 아주 작은 힌트를 얻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글은 옥스포드에서 아프리카 정치학을 강의하는 Nic Cheeseman과 케냐 현대 예술가 Wambui Wamae Kamiru가 함께 작성했다.


'아프리카' 사람들의 얼굴. ⓒ J-Mace

케냐사람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언뜻 보기에도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는 케냐인의 정체성 문제는 흔히 '단일민족'이라고 불리는 한국인의 정체성보다 훨씬 복잡하다. 일단 '케냐다움 (Kenyaness)'대한 감정적인 합의는 커녕, 각자 다른 뿌리를 가진 구성원들이 각자 나름의 가치를 '케냐다움'이라는 이름으로 강조하고 있고, 민족이나 종교 같은 강력한 하위 정체성 위에 국가 정체성을 강제로 억지로 쌓아 올린 꼴이라 언제 2007년 처럼(2007년 대선 결과가 발표된 직후 여야 지지자들이 서로 폭력을 휘둘러 1,500명 이상의 사상자를 기록했던 사건) 와르르 무너질지 위태로운 느낌이 든다.


과거 정체성의 위기는 주로 (흔히 부족이라고 불리는)민족성이 원인이었다. 하지만 최근 종교가 케냐인들을 반목하게 하는 요소로 떠오르고 있다. 이런 현실은 나이로비 국립 미술관에서 있었던 공공 예술 프로젝트 "Who I am, Who We Are"을 탄생시켰다. 이 프로젝트는 케냐인 예술가 Wambui Wamae Kamiru와 콩고민주공화국 출신의 예술가 Xavier Verhoest가 주도했고, 국가성이 어떻게 사람들의 정체성과 일상 상호작용을 통해 받아들여지는지 탐구했다. 이 전시회에서 글쓴이는 케냐인들이 어떤 식으로 스스로의 정체성을 인식하고, 그 인식이 미래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살필 수 있었기 때문에 중요하다고 평가했다.



케냐인들의 정체성에 대한 연구는 학계에서 오래된 주제 중 하나이다.

케냐 내에서 다양한 종류의 정체성들이 우위를 점하기 위해 경쟁하고 있다는 인식은 새로울게 없는 사실이다. 1990년대 Stephen Ndegwa는 American Political Science Review지에서 케냐가 민주주의로 이행하는 것에 실패한 이유를 "민족 정치 공동체 속의 공화주의적 시민권"과 "국가 정치 공동체 속의 자유주의적 시민권"의 부조화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사회적으로 형성된 민족적 정체성, 권위, 정통성이 국민 국가에서 법적으로 승인된 자격, 권위, 정통성과 경쟁"하고 있다고 말했다.

The notion that different kinds of identities compete for supremacy in Kenya is nothing new. Writing in the American Political Science Review back in the 1990s, Stephen Ndegwa argued that Kenya’s failure to transition to democracy was in part the product of the incompatibility of “republican citizenship in ethnic political communities” with “liberal citizenship in the national political community”. More specifically, he suggested that “the socially enacted relationship between ethnic identity, authority, and legitimacy competes with the legally sanctioned membership, authority, and legitimacy of the nation-state”.


다른 말로 하자면, 케냐사람들은 한번에 감정적으로 두 방향을 지향한다는 것인데, 그들은 시민공공선을 위해 시민국가적 정체성을 증진시키길 바라면서도 국가 정체성 형성을 방해하는 하위 정체성들을 믿고 승자 독식의 정치를 유지시키지 않을 수가 없다.

In other words, Kenyans are emotionally pulled in two directions at once. On the one hand, they want to invest in a civic national identity that promotes the common good. On the other, they feel compelled to buy into the kind of sub-national identities that challenge the emergence of a coherent national identity and sustain winner-takes-all politics.


Ndegwa는 이런 "시민권의 이중성은 민주주의의 갈등을 일으킬 뿐 아니라, 어떤 체제가 다민족 국가에 적절한지에 대한 갈등하는 민족 연합체들의 형성으로 끝나고 만다." 달리 말하면 케냐가 직면한 주요한 문제중 하나는 사람들이 그들의 민족집단에 충성하지 국가 정치 공동체에 충성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According to Ndegwa, this “duality in citizenship engenders conflict over democracy — conceived as liberal majoritarian democracy — and results in ethnic coalitions disagreeing over which institutions are appropriate for a multiethnic state”. Or, put another way, one of the key problems facing the Kenyan state is that the primary loyalty of many of its citizens is not to the national political community, but to their own ethnic group.


결국 이 정체성의 문제는 2007년 선거와 그 후의 폭력사태에서 폭발했고, 이 사태는 권력 공유와 개헌을 골자로 하는 합의로 겨우 봉합될 수 있었다. 하지만 2010년 개헌을 위한 논의는 안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크리스챤 종교 지도자들은 개헌안이 무슬림들의 지위를 향상시킬 것이라는 우려 속에 개헌 반대 캠페인을 벌였고, 여당과 연정을 수립하기로 합의했던 야권의 일부 정치인들도 개헌안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벌였다. 결국 화해와 재건을 위해 추진했던 개헌은 이런식으로 또 다른 분열을 낳고 말았다.


예를들어 카렌진 민족의 일부 사람들과 크리스챤 공동체는 정치 개혁을 지지하려는 움직임과 그들의 리더들에게 반대하라고 하려는 움직임이 충돌하며 찢어졌다. 이런 점에서 케냐는 여러가지 경쟁하는 집단들로 분열된 문제뿐만 아니라, 다수 시민들의 마음 속에 서로 다른 정체성들이 경쟁하고 있다는 문제와도 직면해 있다고 할 수 있다.

For example, some members of the Kalenjin and Christian communities were torn between their desire to support political reform and the instruction of their leaders to oppose it. In this sense, the challenge is not just that Kenya is divided into various competing groups, but that these different identities exist and compete for supremacy within the minds of many citizens.


앞서 말한 프로젝트에서는 이렇게 중첩되는 정체성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다. 사람들에게 "당신은 누구입니까?", "무엇이 당신을 케냐 사람으로 만듭니까?", "집단적이라고 할 수 있는 케냐 사람의 정체성이 있습니까? 있다면 그건 정확히 무엇입니까"와 같은 질문들을 사람들에게 던지고, 바디 맵핑(body mapping) 같은 방법을 통해 답을 찾아나섰다. 아래는 바디매핑에 참여한 사람들의 그림과 이야기를 촬영한 영상이다.




이 글에서 소개된 케냐 사람들의 답변은 아주 흥미롭다.


한 유럽 출신의 케냐사람은 이렇게 대답했다.


"이 나라는 정말 속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속하지 않게 하기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어요."


다른 한 참가자는


"나는 부족주의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이건 쉽지 않은 일이고 이것이 끝나길 기도해요. 사람들은 당신이 이해하든 안하든 루오어로 말을 걸거나 당신의 이름 대신 당신의 출신 지역으로 당신을 부를 거에요. 이런 것들은 내가 거기 출신이 아니라서 거기에 속할 수 없다는 느낌을 줘요. 매일매일 사람들은 나의 공동체에 대해 이야기해요."

라고 이야기 했고, 극단적으로 비판적인 경우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케냐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진정으로 사랑할 줄 몰라요. 우리는 자원도 있고, 인력도 있고, 제도도 있지만 다른 사람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요. 정치인들은 이 상황을 이용해요. 분열의 씨앗을 뿌리면서 말이죠. 우리는 그 독을 삼키고, 이야기하고, 관계하지만 사실은 무심하게 무책임한 사기 게임을 하고 있을 뿐이에요."

나이로비에 사는 젊은 소말리 청년은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케냐 사람인가?"라는 질문은 온 저녁동안 저를 사로잡았고, 밤이 되어서야 떠오른 것은 우리는 편리함이고, 우리는 어떤 특정한 순간의 일을 해내기 위해 되고 싶은 것이 되는 것이라는 사실이었어요. 어떤 순간에 소말리인이 되는게 더 적합하면 소말리 인이 되는거구요, 케냐인이 되는게 더 적합하면 케냐인이 되는거에요. 예술가가 되는게 적합한 순간에는 예술가가 되구요, 북동부 출신의 사람이 되는게 적합한 순간엔 북동부 사람이 되죠. 이렇게 망가진 체계는 우리를 매 순간에 알맞은 케냐의 일부가 되도록 강요해요. 카멜레온이 되는거죠. 이런게 저를 케냐인으로 만드는 것이냐구요? 제 생각엔 모든 케냐인들이 이렇게 하는 것 같아요. 국가적 상황에 맞추기 위해 민족적으로 스스로를 조정하던가 살아남기 위해 자아를 완전히 제거해야 할 때도 있죠."

바디매핑 작품들이 걸린 전시장 풍경 ⓒ WHO I AM, WHO WE ARE.


이 소말리 청년의 말은 탄자니아에서 만난 많은 사람들 혹은 사기꾼(?)들을 떠오르게 한다. 같은 동네에 살거나 자주 왕래하는 곳에 사는지 일하는지, 여튼 오며가며 자주 만나는 사람들이 꽤 있었는데, 그 중에 몇몇은 도대체 뭐하는 사람인지 알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어떤 날은 온 동네 대소사를 챙기는 오지랖퍼 같아 보였는데 사실은 그 동네에 대해 아는게 별로 없는 사람이었다던가, 물어볼때 마다 직업이 바뀐다던가, 가족관계가 바뀐다던가 하는 일들이 종종 있어 도대체 뭐하는 사람인가 헷갈리게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같이 일을 하던 사람도 과거사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일관되지 않은 모습을 보여 나를 혼란스럽게 하곤 했었다. 당시엔 뻥쟁이들이라고 생각하곤 했는데, 지금은 정말 그들은 여러가지 정체성을 내재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중첩적인 정체성에 대해 나쁘게 이야기하는 사례들만 언급된 것 같지만, 이런 정체성이 긍정적 역할을 하기도 한다. 공동체 내의 소속감을 증진시켜 함께 나아갈 수 있도록 하거나 어려운 시기에 서로를 도울 수 있게 하기도 한다. 아직 '케냐 사람'이라는 국가정 정체성이 완전히 성숙되지 않은 상황에서 민족 정체성같은 하위 정체성이 없는 것 보다는 그래도 있는게 낫다는 생각이 든다. 정체성을 잃은 인간은 방황하게 되고, 이상한 짓을 벌일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이 결국엔 케냐가 '부족주의'를 벗어나 케냐인들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포용적인 정치로 나아가길 희망했다며 글쓴이는 이렇게 글을 마무리 하고 있다.

그들은 그 희망이 아직은 멀리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를 위해 투쟁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사람들은 민족 정체성을 약화시키기 위해 무엇을 해야하는지는 잘 모르고 있지만, 다음 두가지에 대해선 대체로 동의하는 것 처럼 보였다.
첫째, 케냐사람이 된다는 것에 대해 공개적이고 솔직하게 이야기 나누는 것이 신선한 경험이었고, 많은 경우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둘째, 분열된 정체성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이를 극복하기 위한 첫번째 단계다. 이 이유만으로도 국립 미술관에 전시가 끝나기 전에 가볼만 하다. (전시는 3월 26일 끝났다.)


They recognised that this was a long way off, but that it was something worth fighting for. On the whole, people did not have a strong sense of what could be done to reduce the power of ethnic identities, but they tended to agree on two things.
First, that talking openly and honestly about what it means to be Kenyan had been an eye-opening – and in many cases a revelatory – experience.
Second, that understanding divisive identities is an essential first step to overcoming them. For that reason alone, it is worth heading to the National Museum before the exhibition ends on March 26.

전시는 끝났지만, 전시회 블로그 페이지에서 작품들과 영상들을 볼 수 있다.
https://whoweareke.wordpres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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