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강남역.

17일 강남역 인근 화장실, 한 여성이 살해당했다. 그 두 사람은 아무런 관계도 없었고, 살인자는 "여성들이 자신을 무시했기 때문"에 죽였다고 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정신병력 때문에 이 사건이 여성 혐오냐 아니냐를 가지고 논란이 되고 있다.

오늘 종일 이 사건에 대해 생각했다. 근 30여년을 남성으로 살면서 나도 모르게 종종 '남성성'을 드러내며 살았기 때문에, 그리고 살면서 많은 잘못들을 저질렀기 때문에 이 일에 대해 이야기하는게 부끄럽긴 하지만, 그렇다고 침묵할만한 이유는 되지 않는 것 같았다. 뭐라도 하고 싶어서 동생에게, 친구에게 조심히 다니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메시지를 보내면서 그저 조심히 다니라고 밖에 못하는 내 처지가, 조심히 다녀야 하는 그들의 처지가 더 슬펐다. 그래서 용기를 내서 뭔가 더 말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 일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용기'를 내야만 했다. 생각하고 타이핑하는 이 순간에도 머뭇거림이 끊이질 않는다. 왠지 모르게 긴장된다. 왜 이게 이리도 어려운건지, 그저 인터넷에 나의 생각을 밝히는 일인데 왜 이렇게 긴장이 되는 건지, 가만히 생각을 해봤는데, 바보같아 보이거나, 위선자처럼 보이거나, 유난떠는것 처럼 보이거나, 어디선가 배제될지도 모른다는 등등의 여러가지 두려움이 나를 경직되게 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남성인 나 조차도 이렇게 감정소모가 큰 이유는, 우리 사회가 이 이슈에 대해 그만큼 폭력적이고 억압적이기 때문일까? 내가 너무 예민한 탓일까?


다시 17일 사건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나는 이 사건이 '완전히' 정신병적 이유에서 발생했다거나, '완전히' 여성혐오의 이유에서 발생했다곤 생각하지 않는다. 아마도 둘다 이 끔찍한 사태를 원인일 것이다. 더 깊숙히 파고 들어가면 그가 왜 이렇게 극단적인 짓을 벌였는지 거기에 사회적 책임이나 문제는 없었는지 드러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그 사건은 이미 '대한민국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 '우리 사회의 여성혐오'에 대한 논의로 진화했고, 많은 사람들이 그 살해당한 여성에 감정이입을 하며 여성혐오를 멈추라고 말하고 있다. 나에겐 이게 중요하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이건 개인적 범죄일거야, 정신병일거야, 혹은 '선동질'일거야 라며 갑자기 비판적으로 변신해서 거리를 두는 동안, 다른 무리의 사람들은 살해당한 여성에게 감정이입을 했다. 대다수가 여성으로 구성된 그 무리는 이미 삶의 경험을 통해서 이런 일이 자신들에게도 일어날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여자라서 살해당할 수 있다'. '그게 나였을 수 있다.' 당신이 여성을 혐오하는 사람이든 아니든 이 현상을 여성혐오로 부르든 아니든, 수많은 여성들이 느끼고 있는 이 위협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절반의 사람들이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살아야 한다면 그 현실을 바꾸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게 아주 당연하다.

당신이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지만, 인종차별을 당하는 당사자가 아니지만 인종차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생각하고 반대하는 것, 자녀를 둔 부모가 아니지만 아동학대에 분노하는 것 처럼 아주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그 노력의 중심에는 의도했든 안했든 폭력을 가하거나 억압적인 그룹으로 분류되는 '남성'이라는 성별을 가진 사람들이 여성들과 함께 서야 한다. '나는 아니야', '나는 그들과 달라'라고 생각만 하지 말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찾고 바꾸어 나가려는 노력을 함께 해나가야 한다. '남성'이라는 집단 내에도 억압받는 남성들이 있기 때문에 그 노력은 여성과 남성 모두가 행복해지는 세상을 만드는데 기여할 것이다.

그 노력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는 아직 나도 고민이다. 지금은 여성 혐오 반대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당장 강남역 10번 출구에서 들려오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데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남성이 여성의 편에 서서 목소리를 내는 일이 불편하고 어색하고 뭔가 석연치않을 수 있다. 나처럼 두려움을 느낄 수도 있고, 어쩌면 '남자답지'않은 일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나도 그렇다, 아직은 어렵다. 하지만 이렇게 '남자다움'을 벗어 던지는 것 부터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다. 불편하고 어색한걸 자꾸 하는 연습을 하자.


당신의 삶에 불편함과 두려움이 없다는 것은, 당신이 다른 사람들을 억압하는 삶을 누리고 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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