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아들, 어머니와 딸의 관계는 특별하다고들 합니다. 생각해보면 어머니는 옆에서 아웅다웅했던 존재였고, 아버지는 약간은 앞에서 뒷모습을 많이 보여주던 존재였습니다. 운전을 하는 아버지의 뒷모습, 책상에서 무언가 쓰시던 아버지의 뒷모습, 다른 어른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아버지의 뒷모습까지,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는 일들이 많았지요.
나이가 들고 키가 크고 머리가 커지면서 아버지와 아들 관계는 미묘하게 변합니다. 아버지의 오랜 경험을, 어느새 머리가 커진 (덩치도 커진) 아들은 지식으로, 혹은 얄팍한 경험으로 넘어섰다고 생각하게 되고, 아버지를 앞서 걸어가기 시작합니다. 빠른 걸음으로. 저 만치 걸어가 뒤돌아보며 아버지를 기다리기도 하고, 답답해 하기도 하면서.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살아가다보면, 아버지의 뒷모습이 그리울 때가 생깁니다.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고 따라가던 시절이 그립고, 아버지가 운전해주시던 그 차가 그립습니다. 그리고 항상 적당한 거리를 두고서 앞서 나가던 아버지가 생각나 저 멀찍히 앞서 걸었던 내가 민망해지기도 합니다.
저는 아들이라, 아버지에 대한 생각을 종종 합니다. 아버지는 나에게 아버지이고, 한편으로는 또 나의 미래였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아들에겐 아버지가 생각하게 하는 존재라면 딸에게는 엄마가 생각하게 하는 존재인가봅니다. 이번에 연극을 보면서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얼마전에 대학로에서 본 연극 '가을 소나타'는 엄마와 딸의 관계에 대한 연극입니다.
소극장 연극만 계속 보다가, 좋은 기회가 생겨서 살면서 처음 정극을 보게 되었습니다. 가을 소나타. 원래는 잉마르 베르히만의 동명 영화가 원작이라고 하는데요, 영화와 거의 같은 대사로 연극은 진행됩니다.
엄마와 딸의 관계, 이 연극, 영화속의 두 사람은 소나타와 같습니다. 소나타는 보통 '제시부'-'전개부'-'재현부'로 구성되는데요, 극 안의 엄마와 딸은 가까워지면 서로 충돌하고 상처주고, 멀어지면 서로 그리워하고 기대고 싶어하고, 애틋한 관계를 마치 소나타처럼 계속해서 반복합니다. 이 연극의 첫장면과 마지막 장면이 정말 흡사한 것도 그런걸 염두에 둔 구성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가족이 마냥 서로 사랑하고 의지하고 좋을 수 만은 없는 관계입니다. 때론 정말 화가나고 싫고 미워도, 계속해서 함께 살아왔고 함께 살아가야 할 가족이기 때문에 갖은 수단을 동원해서 감정을 숨기기도 하고, 간접적으로 감정을 표출하기도 하며 끊을수 없는 관계를 유지해 나갑니다. 간혹 튕겨나기도 하지만 어쩔수 없이 다시 만나게 되거나 다시 생각하게 되기 때문에 다른 관계들과는 달리 소나타처럼 계속해서 갈등과 사랑의 연주가 지긋지긋하게 이어질 수 있는게 가족이라는 관계입니다.
가을소나타는 가족사이의 이런 복잡 미묘한 감정선을 날카롭게 포착하여 잘 묘사한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