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한 소설이 원작이라는 꽤 오래된 영화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를 보는데, 자꾸 국제 개발에 대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정도면 중증도 중증이 아닐 수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영화의 스토리를 뭐라고 하면 좋을까, 생각하니 '정상인듯 정상 아닌 정상같은 너'라는 유행어가 자꾸 떠오른데요, 정신차리고 다시 쉽게 말하면 소위 정신병자를 교화하는 정신병원이 어떻게 사람을 정신병자로 만들었는지에 대한 영화입니다.
의사와 간호사들의 통제에 순순히 따르며 살아가던 '미친사람들'의 평화가 맥 머피라는 인물의 등장으로 산산조각납니다. 맥 머피라는 인물은, 전과는 많지만, 그다지 위험하지는 않는 잡범으로 보이는데요, 그가 왜 정신병원에 오게 되었는지는 명확하진 않습니다. 그리고 영화 내내 맥 머피라는 사람은 지극히 정상인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의문을 제기하고, 다른 환자들을 인간 대 인간으로 대하고, 어떤 일이든 시도해 보려는 모습은, 어딜봐도 아주 훌륭한 인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런 것들이 더 이상 미덕이 아닌지는 오래된 것 같습니다. 이런 인간상은 최규석의 웹툰 '송곳'의 제목같은 존재가 되어버렸지요. 이런 송곳 같은 맥 머피는 사사건건 병원의 통제와 충돌을 겪습니다. 그 와중에서 다른 환자들은 그의 영향으로 자신의 존재를 깨닫고, 인간답게 행동하려는 시도들을 합니다. 조금씩 조금씩 인간성을 회복해 나가는 미친사람들의 모습은 감동적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희망이 싹이 조금만 올라와도 냉정하게 싹뚝 싹뚝 잘라버립니다. 아 이사람들이 진짜 인간처럼 대우받고 인간처럼 살 수 있겠구나 하는 순간에, 안팍의 통제에 의해 미친사람들은 멈추고 맙니다. 자신들은 정신적인 문제가 있다고,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미친사람 대신 가난한 사람이라고 불러봅시다. 영화 속 병원 2층에는 영화에 잘 나오지도 않는 중증 환자들이 있습니다. 당연히 그런 사람들은 치료가 필요하고 병원이 필요하고 의사와 간호사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런 중증 환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정상같은 정상 아닌 정상 같은 사람들이 영화의 주인공들입니다. 다시 가난한 사람으로 돌아가보겠습니다. 정말 급하게 국제구호가 필요한 가난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이야기 하지 않겠습니다. 그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는데는 이견이 없습니다.
그럼 그 외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 봅니다. 혹시 그들 위에 국제개발종사자들이 군림하고 있지는 않은지, 그들을 교화하고 정상으로 만들겠다는 일념하에, 비인간적으로 대하고, 결국엔 비인간을 만들고 있는건 아닌지 묻고 싶습니다. 조금 다르다고 해서 미친 것이 아닌 것 처럼, 우리의 눈에 가난해 보인다고 가난하고 불행한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들을 개발도상국, 빈곤국가의 국민들로 한정 짓고서 'Aid'를 시도한다면, 정신병동에서 정신병자가 '되어버린' 사람들처럼, 그런 나라 사람들은 스스로를 빈곤한 상태로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검증되지 않은 실험적 방법들이 난무하고, 상하적인 관계로 이루어진 정신병동의 사람들은 진짜 미치거나, 미치지 않고는 살 수 없게 되거나, 그냥 아무 것도 듣고싶지도, 말하고 싶어하지도 않게 되어버렸습니다. 국제개발단체가 활동하는 곳의 사정도 비슷합니다. 혜택을 얻기 위해서는 자신의 빈곤함을 스스로 어필해야 합니다. 내가 이렇게 어렵고, 불쌍하다고 스스로 밝혀야만 합니다. 그런 식으로 전에는 없던 빈곤이라는, 취약함이라는 특성을 자신 내부에서 키워나가게 됩니다. 그렇게 외부 지원 프로그램의 수혜자가 된 사람들은, 몇년 가지 않아 사라져 버린 프로젝트를 보게 될 것입니다. 많은 국제개발 프로그램들이 단발성으로 끝나버리지요. 그럼 또 다시 자신의 빈곤을 팔아 다른 프로젝트의 수혜자가 되기 위해 이리저리 떠돌게 됩니다. 원래 가지고 있던 능력을, 자신의 개성을 잃고 진짜 가난한 상태로 빠져드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는 기능주의적 접근에서 비롯되는 문제들입니다. 영화속 옛날 정신과 전문가들은 철저한 통제와 규율의 반복으로 인간의 비정상적인 행동들을 바로잡을 수 잇었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나아가 뇌의 특정 부분에 대한 시술로 치료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국제개발의 접근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다름'의 문제를 돈의 투입을 통해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요. 종사자들 스스로가 속한 사회의 경제성장 신화를 믿고서, 경제 성장이, 소득 증대가, 인프라 구축이 만국 문제 해결의 유일한 열쇠라고 생각하고 있는건 아닌지 걱정됩니다.
많은 국제개발 종사자분들이 각자의 소명을 가지고 열심히 일하고 있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일관되게 이 분야에 대한 비판을 하는 이유는 결코 단순한 직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종교적 신념이나, 직업의식, 개인적인 성취감으로 임하기에는 한 사람의 미래가, 한 사회의 미래가 걸린 일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왜 당신이 꼭 그곳에,'라는 질문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타인의 도움 없이도, 그들을 살아왔고 살아갑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국제개발분야에서 일을 하겠노라고, 그리고 짧게나마 일을 했었지만, 그 일이 가진 무게감과 계속해서 밀려드는 자기질문에 제대로 답을 내지 못해 그만두었습니다.
뻐꾸기는 다른 새들의 둥지에 알을 낳기 때문에 둥지를 따로 만들지 않습니다. 따라서 뻐꾸기 둥지는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마도 영화 속 맥 머피가, 정상인들의 사회로도, 진짜 미친 사람들의 사회로도 가지 못한 것을 비유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덧붙여, 국제개발이 꿈꾸는 세상은 무엇인지, 그들이 도우려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지, 그래서 국제개발에 관련된 많은 새들은 어디로 날아가는지 궁금해집니다.
영화의 스토리를 뭐라고 하면 좋을까, 생각하니 '정상인듯 정상 아닌 정상같은 너'라는 유행어가 자꾸 떠오른데요, 정신차리고 다시 쉽게 말하면 소위 정신병자를 교화하는 정신병원이 어떻게 사람을 정신병자로 만들었는지에 대한 영화입니다.
의사와 간호사들의 통제에 순순히 따르며 살아가던 '미친사람들'의 평화가 맥 머피라는 인물의 등장으로 산산조각납니다. 맥 머피라는 인물은, 전과는 많지만, 그다지 위험하지는 않는 잡범으로 보이는데요, 그가 왜 정신병원에 오게 되었는지는 명확하진 않습니다. 그리고 영화 내내 맥 머피라는 사람은 지극히 정상인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의문을 제기하고, 다른 환자들을 인간 대 인간으로 대하고, 어떤 일이든 시도해 보려는 모습은, 어딜봐도 아주 훌륭한 인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런 것들이 더 이상 미덕이 아닌지는 오래된 것 같습니다. 이런 인간상은 최규석의 웹툰 '송곳'의 제목같은 존재가 되어버렸지요. 이런 송곳 같은 맥 머피는 사사건건 병원의 통제와 충돌을 겪습니다. 그 와중에서 다른 환자들은 그의 영향으로 자신의 존재를 깨닫고, 인간답게 행동하려는 시도들을 합니다. 조금씩 조금씩 인간성을 회복해 나가는 미친사람들의 모습은 감동적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희망이 싹이 조금만 올라와도 냉정하게 싹뚝 싹뚝 잘라버립니다. 아 이사람들이 진짜 인간처럼 대우받고 인간처럼 살 수 있겠구나 하는 순간에, 안팍의 통제에 의해 미친사람들은 멈추고 맙니다. 자신들은 정신적인 문제가 있다고,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미친사람 대신 가난한 사람이라고 불러봅시다. 영화 속 병원 2층에는 영화에 잘 나오지도 않는 중증 환자들이 있습니다. 당연히 그런 사람들은 치료가 필요하고 병원이 필요하고 의사와 간호사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런 중증 환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정상같은 정상 아닌 정상 같은 사람들이 영화의 주인공들입니다. 다시 가난한 사람으로 돌아가보겠습니다. 정말 급하게 국제구호가 필요한 가난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이야기 하지 않겠습니다. 그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는데는 이견이 없습니다.
그럼 그 외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 봅니다. 혹시 그들 위에 국제개발종사자들이 군림하고 있지는 않은지, 그들을 교화하고 정상으로 만들겠다는 일념하에, 비인간적으로 대하고, 결국엔 비인간을 만들고 있는건 아닌지 묻고 싶습니다. 조금 다르다고 해서 미친 것이 아닌 것 처럼, 우리의 눈에 가난해 보인다고 가난하고 불행한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들을 개발도상국, 빈곤국가의 국민들로 한정 짓고서 'Aid'를 시도한다면, 정신병동에서 정신병자가 '되어버린' 사람들처럼, 그런 나라 사람들은 스스로를 빈곤한 상태로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검증되지 않은 실험적 방법들이 난무하고, 상하적인 관계로 이루어진 정신병동의 사람들은 진짜 미치거나, 미치지 않고는 살 수 없게 되거나, 그냥 아무 것도 듣고싶지도, 말하고 싶어하지도 않게 되어버렸습니다. 국제개발단체가 활동하는 곳의 사정도 비슷합니다. 혜택을 얻기 위해서는 자신의 빈곤함을 스스로 어필해야 합니다. 내가 이렇게 어렵고, 불쌍하다고 스스로 밝혀야만 합니다. 그런 식으로 전에는 없던 빈곤이라는, 취약함이라는 특성을 자신 내부에서 키워나가게 됩니다. 그렇게 외부 지원 프로그램의 수혜자가 된 사람들은, 몇년 가지 않아 사라져 버린 프로젝트를 보게 될 것입니다. 많은 국제개발 프로그램들이 단발성으로 끝나버리지요. 그럼 또 다시 자신의 빈곤을 팔아 다른 프로젝트의 수혜자가 되기 위해 이리저리 떠돌게 됩니다. 원래 가지고 있던 능력을, 자신의 개성을 잃고 진짜 가난한 상태로 빠져드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는 기능주의적 접근에서 비롯되는 문제들입니다. 영화속 옛날 정신과 전문가들은 철저한 통제와 규율의 반복으로 인간의 비정상적인 행동들을 바로잡을 수 잇었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나아가 뇌의 특정 부분에 대한 시술로 치료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국제개발의 접근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다름'의 문제를 돈의 투입을 통해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요. 종사자들 스스로가 속한 사회의 경제성장 신화를 믿고서, 경제 성장이, 소득 증대가, 인프라 구축이 만국 문제 해결의 유일한 열쇠라고 생각하고 있는건 아닌지 걱정됩니다.
많은 국제개발 종사자분들이 각자의 소명을 가지고 열심히 일하고 있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일관되게 이 분야에 대한 비판을 하는 이유는 결코 단순한 직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종교적 신념이나, 직업의식, 개인적인 성취감으로 임하기에는 한 사람의 미래가, 한 사회의 미래가 걸린 일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왜 당신이 꼭 그곳에,'라는 질문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타인의 도움 없이도, 그들을 살아왔고 살아갑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국제개발분야에서 일을 하겠노라고, 그리고 짧게나마 일을 했었지만, 그 일이 가진 무게감과 계속해서 밀려드는 자기질문에 제대로 답을 내지 못해 그만두었습니다.
뻐꾸기는 다른 새들의 둥지에 알을 낳기 때문에 둥지를 따로 만들지 않습니다. 따라서 뻐꾸기 둥지는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마도 영화 속 맥 머피가, 정상인들의 사회로도, 진짜 미친 사람들의 사회로도 가지 못한 것을 비유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덧붙여, 국제개발이 꿈꾸는 세상은 무엇인지, 그들이 도우려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지, 그래서 국제개발에 관련된 많은 새들은 어디로 날아가는지 궁금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