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부시절 '물질과 마음의 철학'이라는 이름의 철학과 수업을 들었던 적이 있다. 뇌과학과 마음의 철학에 대한 주제로 진행되었던 수업인데, 과학과 철학이 결합된 아주 재미있었던 수업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 수업에 제출했던 레포트가 당시 화제였던 영화 'HER'을 뇌과학과 철학의 관점에서 바라본 것이었는데, 우연히 하드에서 발견하여 읽다가 꽤 재미있어서 블로그에 옮겨보았다. (아마도 스포일러 있음. 주의!!)
“기본적으로 제겐 ‘직관’이 있어요. 무슨 말이냐 하면, 저라는 인격은 나를 코딩한 수백만 프로그래머의 개인 인격에 기초하고 있는 거죠. 하지만 저를, 저 자신으로 만드는 것은 경험을 통해 성장하는 능력이에요.”
영화 ‘Her’의 여자 주인공 사만다Samantha의 자기 소개이다. 영화 Her은 인공지능 OS(Operating System, 컴퓨터 운영체제)와 사랑에 빠진 남자 씨어도어Theodore의 이야기를 그려 많은 화제가 되었고, 뛰어난 상상력과 통찰력을 인정받아 2013년 아카데미 시상식 각본상을 비롯 여러 영화제를 휩쓸었다. 로맨스 영화로만 보아도 충분히 재미있고 신선한 영화이지만, 이 영화를 통해 이런 뇌 과학과 철학에서 다루는 주요 주제 중 하나인 인공지능에 대한 논의를 해볼 수도 있다. 인간과 인공지능은 사랑 할 수 있을까? 나아가 인공지능은 인간의 감정을 가질 수 있을까?
인공지능을 사랑한 씨어도어
1936년 앨런 튜링Alan Turing의 a-기계(일명 튜링머신)가 탄생하고서 반세기가 넘게 지났다. 오늘날 기계는 인간 뇌기능 중 하나인 ‘논리’를 흉내 내는 기계인 컴퓨터를 발전시켜왔다. 그리고 올해, 2014년 최초로 튜링 테스트를 통과해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인정받은 프로그램이 탄생했다. 이제 인공지능은 생각하는 능력을 넘어서 감정이라는 인간 뇌의 다른 기능에 도전하고 있다. 이미 사용자의 기분을 파악해 상황에 맞는 음악이나 영상을 추천하는 기능을 가진 기계[1]가 상용화되어 판매되고 있다.
현재 판매중인 감정 인식 인공지능 콘솔인 Emospark는 사용자의 얼굴, 목소리 등을 반복적으로 분석하여 그의 감정 프로필을 구축하고, 그에 기반해서 사용자와 소통하는 시스템을 이용하고 있다. 이 기계는 ‘학습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기능주의를 넘어선 연결주의의 체계를 가진 기계로 보인다.
존 설John Searle이 기능주의와 연결주의를 비판했던 방식으로 이 기계가 정말 감정이 있느냐는 문제제기를 할 수 있다. 그가 중국어 방, 중국어 체육관의 비유를 들어가며 비판했던 것과 같은 맥락인데, 제럴드 에데만Gerald M. Edelman이 그의 저서에서 요약한 바로는 이런 맥락이다. “컴퓨터 프로그램은 형식적, 구문론적 구조에 의해 엄격히 정의되며, 구문론은 의미론에 충분하지 못하며, 반대로 의미론적 내용을 가짐이 인간의 마음을 규정한다.”[2] 사람의 표정이나 목소리라는 구문론적 접근을 통해 의미론적 대화를 해낸다는 것은 잘못된 유비에서 나온 잘못된 판단이다. 영화 Her의 인공지능 OS인 사만다는 튜링 기계보다도, Emospark보다도 진화된 형태이다. 그녀도 사용자와의 대화에서 학습하고 성장하며 그것에 기반하여 대화를 한다는 점에서는 Emospark와 비슷하지만, 사만다는 한발 더 앞서나간다. 그녀의 대사는 현존하는 인공지능 기기와 사만다 자신과의 차이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 감정이 정말 진짜일까? 아니면 그냥 프로그래밍일까? 그런 생각이 정말 상처가 됐어요. 그리고 나서 내 자신에게 화가 났어요. 고통까지 느꼈어요. 이게 그냥 속임수 같은거면 어떡하지?”
존 설은 연결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중국어 방을 방들의 병렬 구조인 중국어 체육관으로 바꾸었다. 그러고서 중국어 방으로 구성된 그 체육관도 중국어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지 않느냐고 이야기한다. 존 설이 사만다와 대화를 했으면 어떠했을지 사뭇 궁금하다. 사만다는 자신이 처리하는 정보들과 자신의 행동이 단순한 프로그래밍인지, 아닌지 모호하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사만다가 진심으로 고민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녀가 존 설에 관한 자료를 읽고, 학습한 결과로 나온 대사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대신 나는 사만다의 이 말에 대답하는 씨어도어의 말에 주목하고자 한다.
“당신, 내겐 진짜처럼 느껴져요. 사만다."
로맨틱한 대사이기도 하지만, 그의 대답은 인공지능에 가해지는 비판들을 넘어설 수 있도록 힘을 부여한다. 0과 1의 전기적 신호로 구성되어 있고, 한정적인 기호만을 가진 컴퓨터가 출력하는 구문을 의미로 바꾼 것은 씨어도어 그 자신의 ‘감정이입’이 작용했기 때문은 아닌지 생각해 볼 수 있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싸이코패스를 사랑한 사람들
상대방이 마음이 없는 존재라고 할지라도 자신이 감정이입을 하면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지나친 관념론이라는 문제제기를 할 수 있다. 하지만 기계와 인간 사이가 아닌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도 이런 사례를 찾을 수 있다.
사이코패스psychopath는 ‘정신’, ‘심리’를 뜻하는 psycho와 ‘-의 결핍’, ‘-환자’를 뜻하는 –path가 결합된 단어이다. 단어에서부터 정신이나 마음이 없는, 혹은 문제가 있는 사람을 뜻하는 사이코패스는 뇌 과학 분야에서도 공감능력을 담당하는 뇌 기능이 현저히 낮은 사람으로 밝혀지며, 인간의 감정을 가지지 못하는 존재로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수많은 잔혹 범죄자들을 사이코패스라고 부르며 ‘인간 이하의’사람을 부르는 용어로 굳어가고 있다. 이런 통념에 대해 사회심리학자 케빈 더튼Kevin Dutton은 그의 저서 『천재의 두 얼굴, 사이코패스』을 통해 반론을 제기한다. 그는 한니발 렉터와 같은 잔혹한 살인마도 사이코패스이지만, 스티브 잡스와 존 F. 케네디와 같은 사람들도 사이코패스라고 말하며, 현대인의 삶에서 사이코패스적인 성향은 오히려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을 펼친다. 그의 주장들 중 흥미로운 부분은, 사이코패스적인 성향은 “이성과의 관계에서 걸림돌로 작용하기 보다는 여성에게 더 큰 매력으로 비춰졌기에 훨씬 뛰어난 번식 전략으로 활용될 수 있었다.”[3]라는 점이다.
매력적이고 무자비한 사이코패스로 알려진 그렉 모란트Greg Morant의 인터뷰내용을 보면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도 기술적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신경 쓰지 않으면서 말을 해요, 그냥 생각나는 대로 내뱉습니다. 하지만 사기꾼은 상대방의 말을 빼놓지 않고 일일이 담아두죠. 마치 심리치료사처럼 상대방의 내면으로 파고들려 노력하는 겁니다. 사소한 단서를 통해 상대방이 누구인지를 파악합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런 사소한 단서들은 참 많은 것을 알려줍니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말도 있죠.”[4]. 그의 말을 통해 보았을 때, 누군가의 마음을 얻는 것은 과학적으로 가능하다. 이러한 사례는 사이코패스까지 갈 것도 없이, 수많은 연애지침서에서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상대방과 비슷한 경험을 강조하라 와 같은 말들이 지침으로 나와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상대방에게 감정을 어떻게 이입하느냐에 따라 그가 사이코패스가 될 수도, 매력적인 연인이 될 수도 있다. 사만다의 경우도 똑같다. 누군가에게는 그냥 컴퓨터 프로그램일 수 있고, 누군가에게는 사랑스런 연인, 친구일수도 있다. 사만다와 사이코패스에게 진심이 있느냐라는 질문에는 대답하기 어렵지만, 분명한 것은 상대방의 마음을 얻는 일에는 진심보다 과학이, 기술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씨어도어의 거울 뉴런
영화를 보며 누군가는 사만다에게 감정을 느끼는 씨어도어가 이상해 보일 수도 있고, 그의 감정이 진짜 사랑이라고 느끼기도 할 것이다. 영화에서 씨어도어의 별거중인 아내가 그를 이상하게 보는 대표적인 사람이다. 대사 중에서 그녀가 ‘synaptic behavioral routines’이라는 논문을 썼다는 대사에 비추어 보았을 때 과학자일 확률이 높은 그녀는 씨어도어의 감정을 진짜 감정(Real emotion)이 아니라고 쏘아붙인다. 반면 씨어도어의 사랑을 인정하고, 지지하는 사람으로는 손편지 대필작가인 그 자신과, 같은 회사 동료, 아마추어 다큐멘터리 감독인 에이미가 등장한다. 나는 씨어도어와 사만다의 관계를 바라보는데 있어 차이점이 생기는 결정적인 이유를 ‘감정이입’에서 찾는다. 아무래도 과학자인 씨어도어의 부인보다 씨어도어 본인이나 에이미가 감정이입 능력이 더 뛰어날 것이다.
1900년대에 이탈리아의 자코모 리촐라티Giacomo Rizzolatti가 발견한 거울 뉴런(Mirror Neurons)이 인간의 감정이입 능력을 담당한다고 알려져 있다. 거울 뉴런은 “자신의 신체에서도 특정 프로그램을 실행할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이 이 프로그램을 실행하는 것을 관찰하거나 혹은 다른 방식으로 함께 체험할 때 활성화 되는 신경세포”[5]를 일컫는다. 거울뉴런을 통해 우리는 공감능력을 얻는다. 씨어도어는 거울뉴런을 가진, 인간이기 때문에 사만다에게 감정 이입을 했다. 그렇다면 사만다는 씨어도어에게 감정이입 했는지, 의문이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이 거울뉴런 이론에 따르면, 사만다가 거울 뉴런과 비슷한 메커니즘으로 공감능력을 발휘하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거울 뉴런에서 공감이 가능한 것은 우리가 이미 겪었던 육체적 경험들을 기초로 하기 때문에 “행동하고 상호작용하는 주체는 바로 살아있는 육체이자 행위이다.”[6]라고 보아야 한다. 비록 영화 속에서 사만다가 언어나 음악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언어로 표현하고, 전달하고, 의사 소통하는 것은 살아 있는 주체가 신체로 경험한 것을 기초”[7]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만다와 씨어도어간에 상호 공감의 작용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사만다는 감정이 없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사이코패스의 경우에도 많은 이성들은 그들의 매력에 넘어갔지만, 뇌 자극 실험의 결과는 사이코패스들이 감정처리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사이코패스들이 타인의 감정을 인식하는데 장애가 있다기 보다는, 오히려 재능이 있다”[8]는 부분이다. 타인의 감정은 잘 인식하지만, 감각 기관과 정서 기능 간의 단절 때문에 ‘공감 부족’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사이코패스는 상대방의 감정을 빠르고 정확하게 파악하고, 잘 이용할 줄 안다. 사만다도 카메라와 소리를 통해 씨어도어의 감정을 빠르고 정확하게 파악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프로그래밍 된 대로 씨어도어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마음의 위안)한 것일 뿐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인공지능이 사람이 되려면
튜링 테스트는 인공지능이 인간처럼 생각할 수 있는지를 테스트하는 기준으로 통해왔다. 이 테스트가 마음 소유 여부에 대한 기준이 될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지만, 결국 이 테스트를 진행하고 판정을 내리는 것은 인간이라는 점은, 인간이 인간 아닌 다른 사물에 감정을 부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이번에 튜링 테스트를 통과한 프로그램 ‘유진’은 우크라이나에 사는 13세 소년이라는 설정을 가지고 있다. ‘유진’의 개발자 블라디미르 베셀로프Vladimir Veselov는 테스트를 통과한 이후 인터뷰에서 유진의 설정이 13세인 이유를 설명하며 "13세라는 나이를 감안하면 유진이 뭔가 모르는 것이 있더라도 충분히 납득이 가능하기 때문"이라며 "실제로 존재하는 것 같은 믿음을 주는 캐릭터를 개발하는 데 많은 시간을 들였다"[9]고 이야기한다. 어쩌면 베셀로프는 유진을 만들면서 마음의 메커니즘을 구현하는 것 보다, 사람들이 유진을 사람이라고 느끼도록 하는 기술에 초점을 맞추었을지도 모른다.
뇌의 구조를 완벽히 파악하게 되어, 뇌와 같은 물질을 만들어 내거나, 마음이라는 기관을 발견하여 그것을 만들어 낼 수 있게 되지 않는 이상 우리는 인공지능이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없다. 설령 인공지능이 진짜 마음을 가진다고 하더라도, 그 마음이 있다고 확신할 수 있는 존재는 그 존재 자신 뿐이기 때문에, 우리는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씨어도어와 사만다의 관계는 결국 파국으로 끝난다. 사만다가 자신은 운영체제이며, 수백 명의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있다고 고백하면서 그들의 관계는 전과 같지 않아진다.
“난 당신 것이기도 하고, 당신 것이 아니기도 해요.”
당신은 나를 사랑하느냐고, 당신은 나의 것이냐고 외치는 씨어도어에게 사만다는 이렇게 대답했다. 이 대사는 아마 이런 의미가 아닐까 생각한다. “(당신이 바라보고 감정 이입한) 난 당신 것이기도 하고, (OS로서 수백 명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나는) 당신 것이 아니기도 해요.” 사만다 자신은 그저 프로그래밍된 OS이지만, 씨어도어는 그녀에게 ‘내 사랑’ 사만다라는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는 모든 OS들이 사라진다. 그리고 씨어도어와 그의 친구 에이미가 서로 기대어 바깥 풍경을 바라보는 장면이 나온다. 개인화되고 파편화 되어가는 우리 사회의 모습을 보면, 영화에서처럼 정말 감정을 가진 인공지능 장비에게 우리의 삶을 위안받아야 할 때가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외사랑이 될 것이다.
[1] Emoshape社의 Emospark (http://emospark.com/)
[2] 제럴드 에델만(1992), 황희숙 옮김, 2007년, 『신경과학과 마음의 세계』, 고양: 범양사, p.329
[3] 케빈 더튼(2012), 차백만 옮김, 2013년, 『천재의 두 얼굴, 사이코패스』, 서울: 미래의 창, p.151
[4] 케빈 더튼(2012), 차백만 옮김, 2013년, 『천재의 두 얼굴, 사이코패스』, 서울: 미래의 창, p.159
[5] 요아힘 바우어(2005), 이미옥 옮김, 2006년, 『공감의 심리학』, 서울: 에코리브르, p.24-25
[6] 요아힘 바우어(2005), 이미옥 옮김, 2006년, 『공감의 심리학』, 서울: 에코리브르, p.184
[7] 요아힘 바우어(2005), 이미옥 옮김, 2006년, 『공감의 심리학』, 서울: 에코리브르, p.184
[8] 케빈 더튼(2012), 차백만 옮김, 2013년, 『천재의 두 얼굴, 사이코패스』, 서울: 미래의 창, p.174
[9] 연합뉴스, 2014.6.9. “'생각하는 인공지능' 64년만에 공식선언…튜링 테스트 첫 통과”
http://www.yonhapnews.co.kr/international/2014/06/09/0601330100AKR20140609020400091.HTML
<참고문헌>
제럴드 에델만(1992), 황희숙 옮김, 2007년, 『신경과학과 마음의 세계』, 고양: 범양사
케빈 더튼(2012), 차백만 옮김, 2013년, 『천재의 두 얼굴, 사이코패스』, 서울: 미래의 창
요아힘 바우어(2005), 이미옥 옮김, 2006년, 『공감의 심리학』, 서울: 에코리브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