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우무중구 사용설명서

5월 21일 열렸던 '서울 아프리카 페스티벌'의 지식존에 소개된 글. 원래 글은 주저리주저리 길었는데, 아프리카랩 여러분들이 아주 깔끔하고 재미있게 잘 정리해 주셨다.




원래 글은 이랬다.





나의 우무중구 사용설명서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김춘수 <꽃>의 가장 유명한 구절 뒤에 따라오는 구절입니다. 르완다에 지내다 보니 나를 부르는 사람은 정말 많지만, 정작 내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은 없어서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사람들은 나를 ‘우무중구’(키냐: Umuzungu)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다른 외국인도 그렇게 부릅니다. 동아프리카 지역에 사는 외국인이라면 피할 수 없는 우무중구의 굴레, 어떻게 하면 ‘피할 수 없으면 즐겨’볼 수 있을까, 나의 ‘우무중구’ 사용설명서를 공개합니다. 이 설명서는 언제 어떻게 ‘우무중구’라는 용어를 써야 하느냐가 아니라, ‘우무중구’라는 정체성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에 대한 설명서입니다.


* 비슷한 상품으로 탄자니아를 비롯한, 다른 동아프리카 국가의 ‘음중구’(Mzungu, 스와힐리어)와 중국인을 뜻하는 ’우무신와‘(Umushinwa, 키냐르완다어)와 ’음치나‘(Mchina, 스와힐리어)가 있습니다.
** 괄호 안에서 사용되는 키냐르완다어 앞에는 ‘키냐’를, 스와힐리어 앞에는 ‘스와’를 붙였습니다.


기본사항

‘우무중구’는 스와힐리어의 중구카(스와:zunguka, 떠돌다, 빙빙 돈다는 뜻)에서 왔다는 설이 여러 곳에서 언급됩니다. 오래전부터 백인들이 이 대륙에 왔다 갔다 떠돌던 사람들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백인=우무중구’가 되었고, 다시 의미가 확장되어 외국인 전체를 무중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원래 의미와 달리, 오늘날의 ‘우무중구’는 기본적으로 ‘밝은 피부색’을 전제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아프리카계 미국인들도 ‘우무중구’라고 불렸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 정체성은 불가피하게 주어지지만, 오래 머물수록 ‘우무중구’정체성을 내재화하여, 스스로를 ‘우무중구’라고 부르거나, 다른 외국인을 ‘우무중구’라고 부르는 당신을 보기도 합니다.


효능

‘우무중구’는 여러 효능이 있습니다. 자꾸 사람들이 부르니 피곤하기도 하고, 기분 나쁠 때도 있고, ‘셀렙’이 된 것 마냥 으쓱하기도 합니다.


‘우무중구’ 사용하기

하나) 친절하기

여러분을 ‘우무중구’라고 부르는 사람들 대부분은, 특히 아이들은 악의 없이 그 단어를 씁니다. 우리도 한국에서 외국인을 만나는 게 흔한 일이 아닌 것처럼, 여기 사람들에게도 외국인을 보는 건 신기한 일이겠죠. 신기한 광경에 놀라서 ‘우무중구’라는 말을 뱉었거나, 외국인과 이야기해 보고 싶은데, 부르자니 막상 떠오르는 게 ‘우무중구’라서 그렇게 불렀거니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무중구’에 대한 인상과 미래의 ‘우무중구’를 위해 되도록 친절히 답해주세요.

특히 아이들에게 친절해 주세요. 막상 “우무중구!”라고 불러놓고선 수줍어하며 손을 흔드는 아이도 있고, "코메라 우무중구!"(키냐:Komera, 직역하자면 Be strong이고, '고생하십니다'정도로 의역할 수 있습니다. 웃어른에 대한 인사입니다)라고 인사를 건네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당신이 만약 키냐르완다어나 스와힐리어가 좀 되고 시간이 있어서, 나는 우무중구가 아니라 누구누구야 하고 이름을 가르쳐 준다거나, 나는 우무냐코레야(키냐:Umunyakoreya, 한국인을 뜻합니다), 혹은 우무냐마항가(키냐:Umunyamahanga, 외국인을 뜻합니다)야 라고 가르칠 수 있다면 그것도 좋습니다. 다만 “내가 '우무중구'면 너는 '우뮈라부라‘(키냐:Umwirabura, 흑인을 뜻합니다)겠네?”라고 되받아치는 건 그리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습니다.

 + 친절하게 응답하기 Tip
살면서 경험해 본 적 없는 많은 관심에 매번 손을 흔들거나, 인사를 건네며 응답하는 건 굉장히 힘듭니다. 특별히 예의를 차려야 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그냥 눈썹인사나 턱인사(눈을 맞추고 눈썹을 위로 올렸다가 내리거나, 턱을 살짝 들었다 내리며 반가움을 표하는 인사법)를 하면 편합니다.


둘) 대화하기

도시로 갈수록, 더 나이든 사람들과 함께 할수록 ‘우무신와’라고 말하는 빈도는 줄어듭니다. 하지만 우리의 존재는 생각보다 더 자주 화젯거리로 떠오르고, 사람들의 대화 속에서 '우무중구'나 '우무신와'라는 단어는 유독 귀에 쏙쏙 들어옵니다. 마음의 여유가 좀 된다면, 살짝 고개를 돌려 ‘내 이야기하니?’라는 표정으로 쳐다보거나, 먼저 인사를 건네봅시다. 상대가 우리를 모르지만, 궁금해한다면, 이야기를 나누면 참 좋겠죠?

기본적인 수준이라도 르완다에선 키냐르완다어를, 탄자니아에선 키스와힐리어를, 다른 나라에서는 그 나라 말을 조금이라도 알고 다니길 권합니다. 영어권 국가가 아닌데, 외국인이 다가와서 다짜고짜 영어로 말 걸면 무섭습니다. 영어를 해야만 하는 상황이라면 영어를 할 줄 아는지 먼저 물어봅시다(키냐:Muvuga Icyongereza? 무부가 이춍게레자? / 스와:Unajua Kingereza? 우나주아 킹게레자?). 여러분이 짧은 키냐르완다어라도 하면, 사람들이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고, ‘우무중구’의 존재가 만드는 묘한 긴장도 깨집니다. 여러분도 꼭 이 경험을 해봤으면 좋겠습니다.


셋) 무시하기

‘우무중구’도 경우에 따라선 기분 나쁘게 들리는 경우가 있고. '우무신와' 뒤에 '칭챙총‘같은 말들이 따라오면 기분이 아주 몹시 상하죠. 하지만, 이미 우리의 존재는 너무나 튀기 때문에 그냥 무시하고 자리를 뜨길 권합니다. 괜히 언쟁 붙어봤자 대부분의 경우 ’화난 우무신와‘로 끝나거나, 자칫 위험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습니다.

 + 과다사용에 따른 부작용
‘우무중구/우무신와’로 인해 기분 나쁜 상황이 반복되면 사람들을 기피하게 되는 증세를 보일 수 있습니다. 이럴 땐 나를 지지하는 사람들이나 종교에 의지하거나, 역사적인 ‘우무중구’들의 업보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여유가 된다면 어떻게 하면 ‘우무중구’가 이질적이지 않은 사회를 만드는데 기여할 수 있을지도 고민해 봅시다.
반대로 정말 자신이 ‘셀렙’인줄 알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저는 가끔 제 방향으로 손을 흔들길래 저한테 인사하는 줄 알고 손 흔들었다가 아니어서 어색해지기도 합니다.


넷) 억지부리지 않기

‘아프리카’ 혹은 ‘현지’에 왔으니 ‘현지식’을 따르겠다고, 외국인들이 다니는 장소들을 피하고, ‘현지스러워 보이는’음식과 문화를 찾아다니지 맙시다. 다른 외국인들이 존재한다고 해서, 다른 외국인들이 많이 찾는다고 해서 그곳에서의 여러분의 ‘아프리카’경험이 훼손되는 건 아니에요. 국제화 시대고, 당연히 아프리카에도 외국인이 있으며, 르완다 사람들도 각자 다른 생활양식을 가지고 살고 있답니다. 아프리카에 왔으니 최대한 ‘현지’스럽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지만, 억지는 부리지 맙시다. 정말 ’르완다 전통 문화’를 알고 싶다면, 민속 박물관에 가는 것을 추천합니다. 르완다 민속 박물관은 수도 키갈리에서 버스를 타면 약 3시간 정도 걸려 도착하는 후예에 있고, 입장료는 6천 프랑, 우리 돈 약 8천 원, 알찬 구성을 자랑합니다. (http://museum.gov.rw/index.php?id=27)


다섯) 어려운 문제

‘우무중구’는 돈 달라고 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납니다. 자주 만나는데 매번 돈을 줄 수도 없고, 거절하면 또 마음이 아프죠. 하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아무에게도 돈을 주지 않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나는 누구는 주고 누구는 안줄지 결정할 수 없었고, 돈을 주는 사람이 있는 한 돈을 달라고 하는 사람들은 계속 있을 것이고, 이 괴로운 고민은 제가 떠난 뒤에 찾아오는 다른 ‘우무중구’에게 전가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 거절하기 Tip?
거절하기 Tip이라고 써두었지만, 그냥 이야기 하나와, 저의 다짐과 고민입니다. 재미있게도 많은 아이들이 “Give me My money!”라고 하는데, 마치 돈을 맡겨놓은 사람처럼 '내 돈'을 달라고 외치는 게 인상적입니다. 저의 지인 ‘우무중구’는 그 말을 듣고서 한참을 자기 주머니와 소지품을 뒤적거리다가, “나한텐 '니 돈' 없는데 어쩌지?”라고 대답했고 아이가 재미있어 했다고 합니다. 저는 대체로 손사래를 치는 편인데, 이제부턴 손을 내미는 사람이 있으면 악수는 해야겠다고, 인사는 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아직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돈이 없다는 대답은 정답에서 먼 것 같습니다)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친절은 나눠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김춘수의 <꽃>은 이렇게 끝납니다.

우리는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우무중구’라고 불리는 사람과 ‘우무중구’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잊히지 않을 하나의 의미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 설명서가 다른 ‘우무중구’에게, 미래의 ‘우무중구’에게 작은 도움이나마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2017. 5. 31. 하나 빼먹은 내용이 있다. '우무중구'들이 경험은 꽤나 다양한데, 기분 나쁜 일이 많은 빈도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한국인 여성을 포함한 아시아 출신 여성들이 가장 많이 괴롭힘이나 성희롱을 겪는 것 같아 보인다. '우무중구'에 대한 괴롭힘, 특히 여성에 대한 괴롭힘은 없어져야 할 잘못된 행태다. 아프리카라는 맥락에서 외국인의 존재가 가지는 특수성과 반성해야 할 점에 대해서 생각하는 동시에, 어떻게 이 잘못된 행태를 바로잡을 수 있을지도 모두 함께, 특히 아프리카를 떠도는(zunguka)하는 외국인들이 아니라, 아프리카에 살고 있는 외국인들이 각자의 이웃들과 고민해야 할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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