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의 비관론

어제 마을도서관 아이들 크리스마스 파티를 마지막으로 올해 사업소 일정은 모두 끝났다. 이제 빨간 날 좀 쉬고, 나머지 연말을 영수증과 함께 보낼 일만 남았다. 작년 11월 말부터 이 일을 시작했는데, 2017년 한해 내내 새롭고 낯선 일들이 끊이질 않아 지루할 틈은 없었지만, 여러모로 꽤 힘들었던 한 해를 보냈다.


마치 안개가 낀 것 처럼 내 한치 앞도 잘 안보인다. 냐루바카. Photo: 우승훈

매사 비판적인, 심지어 비관적인 성격이라 "과연 내가 하는 일은 무엇인가?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하고, 스트레스받았다. 올해 내내 그랬다. 그래서 전에도 글에 쓴 것 같지만, 어쩌면 적성에 안 맞는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은 아직도 한다. 근데, 그래도 일을 하다 보면 내가 하는 일이 사람들에게 '어쨌든 도움'이 된다고 위안삼기도 하고, 사업 성과를 측정하는 지표상으로는 꽤 도움이 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할 때가 있다. 그렇지만 그런 낙관론은 잠시, 항상 다른 생각이 떠오른다. 여기 투입되어, 내 손을 거쳐 집행된 자원이 더 실력 좋은 사람에 의해서 혹은, 다른 곳에서 집행되었다면 어땠을까? 성과처럼 보이는 이 모든 게, 현실과 동떨어진 허상은 아닐까? 사실 실팬데 내가 지금, 우리 조직이 지금, 자기합리화하고 있는 거 아닐까? 등등... 암튼 이건 스트레스이기도 하고, 일을 열심히할 수 있는 동력이기도 했다. 

내 성격이 이상한 건 오랜 시간 나와 함께 해온 문제라서 이젠 그러려니 하는데, 더 힘든 건 사실 외부와의 관계였다. 아직 하고 있는 사업을 둘러싼 관계자들과 관련된 부분에 대해선 아직 말할 수 없고, 대신 한국의 국제개발협력 업계 전반에 실망한 점을 간단히 말하자면, 가장 실망스러운 부분인 업계가 종사자들을 노동자로 잘 보지 않는다는 점부터 시작해서 업계 구성원들의 상호 비판이 부족하단 점, 그래서 아주 피상적인 지식이나 경험을 가지고 "전문가"라고 우기는 자들이 활개를 치고, 선교와 자선 그리고 국제개발협력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단체들이 모두 한 업계에 섞여 있다는 점, 생각보다 경력, 직책, 인맥의 권위가 강한 분위기라 자유롭고 평등한 소통이 잘 이뤄지지 않는다는 점까지, 일하느라 잊을만~ 하면 실망할 일이 생기고, 들리고 해서 꽤 괴로웠다.

얼마 전, 비슷한 일을 하는 분과 나의 실망&불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몇몇 단체의 사례를 들며 업계가 지금은 이렇지만, 서서히 세대교체가 이루어지고 있는 거 아니겠냐 하시기에, 세대교체가 이루어지기 전에 세대를 교체할 사람들은 다 떠나갈 것 같다고 이야기했었다. 경력으로는 나와 비슷한 세대로 엮길 사람들조차도, 우리가 한 세대라고 부르기 어려울 만큼 다양한 태도를(세대교체를 한다면 구세대가 될 그 집단의 태도를 포함해서) 가지고 있고, 한 단체의 진보가 다른 단체와의 연대로 이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나는 아직 이 업계가 더 나은 방향으로 세대교체를 해낼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을 수 없었다.

이 업계가 진보하려면 불손한 사람들이 오래 일할 수 있어야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참여하는 사업이 주민조직 기반이라, 관련책을 읽다가 솔 알린스키의 책 "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의 인용구를 만났다. "불손함은 버릇없거나 무례해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조직가가 법, 전통 혹은 가치, 어떤 것이든 억압받는 자들을 적대하는 일에 도전하고 의문을 던지는 능력이다. 어떤 권력이나 기관에도 문제제기할 수 있고 도전할 수 있다. 주민과 함께 하는 조직가는 주민을 억압하는 사람을 향해 불손해지는 것을 배워야 한다. 억압자의 공포를 잊어버리는 것은 사람을 사물로 격하시키는 침묵의 문화를 깨는 과정의 한 부분이다." 여기서 알린스키는 불손함을 주민조직가의 자질로 이야기하고있지만, 기본적으로 (물리적인 거리가 가깝건 멀건)사람과 함께 일하는 업계 종사자 모두가 어느정도 가질 필요가 있는 덕목이자, 한국의 국제개발업계에 가장 부족하고 또 용납되지않는 자질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 더 해보려고 한다. 나의 현장은 업계 전체가 아니고 바로 이 사업이고, 내가 나에게 응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직업적으로 가장 우선 응답해야 하는 사람들은 이 사업의 참여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싫어하고 실망한 게 많은 만큼, 더 잘해야 한다는 욕심도 든다. 적어도 공범은 되지 말자. 올해 충분히 불손하지 못했던 나를 반성하고 내년엔 더 불손해지자.

다음 주는 주간회의가 없어서, 어제 올해 마지막 주간회의도 가졌다. 한 동료가 주간회의 자료 말미에 "I wish you Merry Christmas(those who believe so) and Happy New Year 2018"라고 적었는데, 사업소에서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은 나뿐이라 누가봐도 저 괄호 안 멘트는 날 위한것 같고, 다양성에 대한 배려에 고마운 마음이 들어 "나도 크리스마스 좋아해요"라고 얘기했다. 암튼, 누구든 크리스마스 좋아하는 사람들 모두 Noheli Nziza(키냐르완다어, 메리 크리스마스) 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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