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운동의 힘, 조직화: CO방법론. 한국주민운동정보교육원. 2010. pp.293. |
(이 글은 2017년 12월 24일 작성한 글을 옮겨 온 글입니다)
연휴를 맞아 평화롭게 책을 읽기로 했다. 원래 읽던 책은 정유정 작가의 「종의 기원」이고 한 반 정도 읽었는데, 암만 생각해도 '평화'랑도 '크리스마스'랑도 거리가 먼 것 같아 크리스마스가 지나면 읽기로 하고, 한동안 내 침대 주변에서 노트북 받침으로 사용되던 책 「주민운동의 힘, 조직화: CO방법론」(한국주민운동정보교육원, 2010)을 펴서 후루룩 읽었다. 정말 후루룩 읽히는 책이다.
사실 이 책을 처음 폈던 건 꽤 오래전인데, 내가 참여하고 있는 사업이 주민조직을 기반으로 하는 사업이고, 장기적으로는 사업에서 주민운동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주민조직과 협력하여 나아가는 게 주요 전략이기 때문에 주민운동에 대해 알고 싶었다. 그런데 마침 이 책이 사업소 책장에 있었고, 사업 제안서를 쓰면서 앞부분은 좀 읽었다.
책 제목은 방법론이지만, 사실상 개론에 가까운 책 같은데, 왜냐하면 주민운동에 대한 이론적 틀이나 구체적인 실천 전략이나 실제 사례들에 대한 언급이 없기 때문이다. '주민운동은 이러이러해야 한다', '주민과 관계 맺기는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당위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지만, 구체적인 방법이나 예시에 대한 언급은 거의 찾을 수 없었다.
당장 실무에 도움이 되는 부분이 적다는 아쉬움이 있긴 하지만, 초심자인 나에겐 주민운동이 지향 해야하는 것들에 대해 아주 쉽게 정리해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되었다. 이를 통해서 나의 태도, 우리 동료들의 태도를 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책을 읽고 나서 이 책의 서문에서 언급된 주민조직방법론을 체계화했다는 솔 알린스키(Saul D. Alinsky)의 책 「급진주의자여 일어나라」(Reveille for Radical)와 「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Rules for Radicals)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니, 어쨌거나 나에게 새로운 분야를 소개해준 입문서로는 훌륭하게 역할 해주었다.
책을 읽으며 흥미로웠던 부분을 소개하자면, 우선 이 책의 초장에 나오는 "주민운동이란 무엇인가"라는 부분이 인상 깊었다. 주민운동은 '주민을 위한' 운동이 아니며, '주민에 의한 주민의 운동'인데, 여기서 말하는 진정한 주민은 '자신이 지역의 주민(住民-살 주)임을 자각하고 스스로 주인이 되어 움직이는 주민(主民-주인 주)'이다.(p.16) 주민운동의 본질에 대해 정말 직관적으로 잘 표현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건 한자문화권에서만 쓰일 수 있는 표현이니, 나는 이 표현을 어떻게 우리 동료들과 나눌 수 있을지, 솔 알린스키씨는 어떻게 표현했을지 궁금해졌다.
지금 하는 일이 주민운동을 지향하긴 하지만 일단 "사업(Project: 한정된 기간과 예산 내에서 특정한 결과 달성을 위한 활동들의 모음)"이다보니, 이 책에서 말하는 원칙을 실천하는 게 어려울 때가 있다. 이 책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데, "때로 주민은 증오와 탐욕과 불성실 등 부정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주민의 이런 모습은 대개 그들 삶의 경험으로부터 형성되어 온 것이다. 주민조직가는 그 어떤 경우에도 주민이 자신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잠재력과 가능성을 가지고 있음을 믿는다. (중략) 때문에 주민 스스로 할 수 있는 것들을 절대 주민조직가가 대신하지 말아야 한다. (Iron Rule - Never do to other what they can do for themselves - Saul D. Alinsky)" (p.26) 이 원칙은 아주 좋지만, 사업은 어쨌거나 정해진 기간 동안 일정 성과를 내야 하기 때문에 주민 스스로 할 수 있는 것들을 주민조직가가 대신하지 않는다는 철칙을 지키는 게 힘들었다. 사업의 성과를 달성하기 위해 주민 스스로가 해내길 기다리기보다는 외부 인력, 자원을 투입할 때가 많았다. 주민운동과 사업 사이에서, 현장 사업 담당자로 어떻게 해야 줄타기를 잘 할 수 있을지, 많은 고민거리를 얻었다.
그리고, 이 책에서는 솔 알린스키 「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을 인용하여 조직가의 자질에 관해 이야기한다. 호기심, 상상력, 유머감각, 소명과 비전, 조직화된 인간성, 자존감, 개방성, 창조성 등 다양한 자질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내가 가장 '꽂힌' 자질은 불손함이다. 아주아주 마음에 들어 얼마 전 썼던 글에서도 인용했는데, 다시 언급하자면, 이 책에서는 불손함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불손함은 버릇없거나 무례해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조직가가 법, 전통 혹은 가치, 어떤 것이든 억압받는 자들을 적대하는 일에 도전하고 의문을 던지는 능력이다. 어떤 권력이나 기관에도 문제제기할 수 있고 도전할 수 있다. 주민과 함께 하는 조직가는 주민을 억압하는 사람을 향해 불손해지는 것을 배워야 한다. 억압자의 공포를 잊어버리는 것은 사람을 사물로 격하시키는 침묵의 문화를 깨는 과정의 한 부분이다." (p.72) 다른 나라에서는 잘 모르겠지만, 특히 한국적인 분위기에서, 그리고 내 직장이 있는 르완다에선 정말 필요하지만 참 발휘하기 어려운 자질인 것 같다. 난 내가 더 불손해질 수 있는 용기와 신념이 있으면 좋겠다.
일과 관련해서 큰 공감을 했던 내용은 주민조직 회의에 관한 것이다. 책에는 "주민지도자와 주민조직가가 회의를 통해 형식적으로 동의만 구하거나 지시하려는 경우가 있다. 주민은 이러한 의도를 쉽게 알아차리고 회의를 형식적인 것으로 여기며 그 중요성을 잃어버리게 된다. 주민지도자와 주민조직가는 자신의 의도를 내려놓고 주민이 자신의 뜻과 생각을 잘 드러내도록 안내해야 한다."(p.188)고 적혀있다. 올해로 3년 동안 진행된 기존 사업이 종료되기 때문에, 나는 새로운 제안서를 준비하는 일에 참여했는데 그 과정에서 다양한 주민 그룹과 많은 회의를 가졌다. 기존 사업의 계속 사업이었기 때문에 큰 틀은 정해져 있고, 나와 동료들이 생각하는 나름의 사업 내용은 있었지만, 확신이 들지 않는 부분이나 개선책을 찾기 어려운 부분이 있어 주민 의견을 듣기 위해서, 추가 수요는 없는지 조사하기 위해서 틈틈이 회의를 개최했다. 그런데 회의를 하다 보면 회의 초반에 내가 찾고자 했던 답을 찾아버리거나, 내가 생각했던 방향과는 너무 다른 방향으로 흐르거나, 분명 다른 그룹과의 회의인데 같은 이야기가 나와서 회의에서 마음이 일찍 떠나게 되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그럼 나는 회의를 빨리 끝내고 싶은 마음에 경청을 대충 하거나, 내 마음에 든 답에 대한 동의를 얻으려는 태도를 보이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참여자들은 귀신같이 나의 태도를 간파했고, 나머지 회의는 정말 형식적으로 되어버리곤 했다. 이 책을 읽기 전에도 이런 부분은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아직 주민조직가의 소양과 인내가 부족했던 것 같다. 이렇게 잘 못 할 때도 있었지만, 몇몇 회의에서나, 아니면 일상 업무에서 나는 아무 의견이 없는 것처럼 보이려고 의식하는 편이다. 그러지 않고 내가 어떤 의견이 있음을 비추면, 비판적이거나 새로운 의견을 듣기가 매우 어려웠다. 르완다가 권위주의 문화가 강해서 특히 그런 것인지 잘 모르겠는데, 사람들이 내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정말정말 잘 파악하고, 그 말을 잘 해준다. 그래서 취하기 참 좋다. 취중 사업수행이 되지 않도록 항상 주의해야 했다.
이 책을 읽고 나니 솔 알린스키의 책이 매우 읽고 싶다. 다음에 휴가 가면 꼭 사 들고 와야겠다. 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이라니, 책 이름부터 심하게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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