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항해: 노예 무역선에 대하여. / The Slave Ship.


얼마전 3월 25일은 UN에서 정하는 국제 노예제도 및 대서양 노예 무역 희생자 추모의 날이었다 (International Day of Remembrance of the Victims of Slavery and the Transatlantic Slave Trade). 그래서 그랬는지, 소셜네트워크를 중심으로 노예 무역선의 비 인간적인 환경에 대한 글들이 공유되었는데, 그 중 한 그림이 유독 눈길을 끌었다. 친구가 보라며 카톡으로 공유해준 글 중간에 있는 그림이었는데, 사람을 마치 짐짝처럼 차곡차곡 쌓아놓은 아래 그림이다.

Sheol © Rod Brown


비현실적으로 비인간적인 모습을 담은 그림이기에, 충격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믿기지 않기도 했다. 그래서 조사를 좀 해보았다. 조사 하면서 본 어떤 페이스북에선 이걸 CG라고 불렀지만, 이건 CG가 아니라 캔버스에 유화물감으로 그린 그림이다.  1996년 로드 브라운(Rod Brown)작품으로, 미국과 영국 양국에서 전시되었던 작품이다. 그림 이름은 Sheol이며, 우리말로는 지옥이나 무덤이란 뜻이다. 제목이 그림이랑 잘 어울린다.

이 그림의 작가 로드 브라운은 30년 넘게 아프리카-아메리칸들의 이야기를 그림으로 담아내고 있는 예술가이다. (공식 홈페이지: http://rodbrownsartcollection.com/ ) 당연히 아프리칸 노예들에 대한 그림도 많다. 위 그림은 브라운이 미국에서 노예들을 주제로 한 그림들의 전시전을 열었을 때 전시한 작품 중 하나이다. 이 그림은 재미있게도 한국에도 소개되어 있다. 작가 줄리어스 레스터(Julius Lester)가 브라운의 전시작품들 중 그중 몇몇 그림을 뽑아 글을 써 그림책으로 만든 책이 있는데, 그 책이 한국에 '자유의 길' (낮은산 출판사)이라는 이름으로 번역 출판되었다.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서, 위의 그림이 진짜 있었던 일이냐고 한다면, 나는 '사실과 상상 사이'라고 대답하고 싶다. 작가가 이 그림을 그리면서 구술증언이나, 문헌자료에 근거했다는 언급이나, 이 그림이 과장되었다고 말하는 코멘트 같은건 찾을 수 없었지만, 조사하면서 찾은 다른 자료들에서 노예 무역선의 환경에 대해 상상해 볼 수 있었다. 그 증거들은 뒤에 이야기하겠다.

그의 다른 그림들 중에도 인상적인 것들이 많다. 더 많은 그림은 앞서 언급한 공식 홈페이지에서 볼 수 있다.

© Rod Brown

© Rod Brown

© Rod Brown

마지막 그림은 왠지 모르게 탄자니아의 바가모요를 떠올리게 한다. 다레살람 북쪽에 위치한 바가모요는 동아프리카에서 가장 노예무역이 활발했던 항구도시 중 하나이다. 당시 노예로 팔려가게된 아프리카인들이 "마음을 놓고 간다 (Bwaga Moyo)"고 해서 바가모요라고 불리게 되었는데, 떠나기 직전 그들의 뒷모습이 저랬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바가모요는 동아프리라 대부분이 중동이나 인도로 팔려갔지만, 어디로 팔려간들, 마음은 똑같지 않았겠나.

2013년의 바가모요 해변 © 우승훈

노예무역경로. 대부분의 아프리칸들은 서아프리카, 중앙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형성된 노예해안에서 배에 올랐다.
David Eltis and David Richardson, Atlas of the Transatlantic Slave Trade(New Haven, 2010)

대서양 노예무역을 통해 아메리카 대륙으로 팔려간 아프리카인들의 숫자에 대한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많은 자료들이 1,200만명이라는 숫자를 인용하고 있다. 약 1,200만명이 아프리카에서 노예 무역선에 오르고, 약 1,100만명이 아메리카 땅을 밟는 것으로 보고 있다. 최소 100만명이 대서양에서 죽었다. 또 배에 오르기 전, 노예 사냥에서도, 배에서 내린 신대륙에서도 어마어마한 아프리칸들이 죽었을 것이다.


대서양을 오가던 노예 무역선에서는 무슨일이 일어난 것일까?

마호마 가도 바쿠아쿠아(Mahommah Gardo Baquaqua)는 베닝에서 브라질로 이동하는 노예무역선에서의 경험을 증언한 바 있다.

"우리는 벌거벗은채로 배에 실렸어요. 남자들이 한편에 우겨넣어졌고 여자들은 다른편에 있었어요. 짐칸은 너무 낮아서 우리는 일어 설수가 없었고, 쭈그려있거나 앉아있어야 했어요. 낮이고 밤이고 우리에겐 똑같았어요. 잘수도 없었어요."

"We were thrust into the hold of the vessel in a state of nudity, the males being crammed on one side and the females on the other; the hold was so low that we could not stand up, but were obliged to crouch upon the floor or sit down; day and night were the same to us, sleep being denied"

- Biography of Mahommah G. Baquaqua, a Native of Zoogoo, in the Interior of Africa.
http://docsouth.unc.edu/neh/baquaqua/baquaqua.html


노예 무역선에 대한 자료로 가장 유명한건 아마 이 그림일 것이다. 우리나라에선 작년 방영된 KBS 다큐 '바다의 제국'에 잠깐 나온적이 있다.



위 그림은 영국의 노예선 Brookes(원래 배 이름은 Brooks인데, 잘못알려졌다함)호의 묘사도이다. 이 그림은  영국에서 노예제 폐지론자들이 노예제의 비인간성에 대해 고발하며 널리 쓰인 그림이다. 이 그림에 따르면 노예 한사람에게 허용된 공간은 40cm남짓 되는 폭. 더 자세히 말하자면, 도면에서는 남성과 여성, 아동에 따라 다른 공간을 계획해놓았다.

남자: 6피트 * 1.4피트 (182cm * 42.6cm)
여자: 5.1피트 * 1.4피트 (155cm * 42.6cm)
아동: 5피트 * 1.2피트 (152.4cm * 36.576cm)

이게 얼마나 좁은건지 감이 잘 안와서 보통사람들의 어깨너비를 알아보고 싶었지만, 어디 마땅한 자료를 찾을수가 없었다. 대신, 보통사람은 아니지만,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어깨중 하나인 박태환의 어깨 너비를 찾을 수 있었는데, 팔뚝의 삼각근을 제외하고도 어깨너비가 46cm라고 한다. 

선실의 높이는 제대로 앉을수도, 당연히 일어설수도 없는 정도의 높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 계획에서 잡은 최대 인원보다 더 많은 인원을 배에 탑승시키기 때문에, 실제로 한 사람당 허용된 공간은 위에 적힌 공간보다 더 작다고 보면 된다.


브룩스호는 리버풀에서 1780년대 건조된 노예 무역선이다. 1783년의 항해 기록엔 609명이 탑승했다고 기록되어있다. 그림에서 보이는 것보다 더 붐비는 선실에 갇혀서 68주를 이동했다는 것이다. 

이 그림을 통한 노예제 폐지론자들의 활동은 작은 결실을 거두어 1788년, 배에 싣는 노예제의 숫자를 선박의 톤수에따라 제한하는 법이 제정되었다(The Dolben Act). 1톤당 1.75명 만을 허용하는 이 법령에 따르면 267톤인 브룩스 호는 454명이 최대 탑승인원이다. 1783년의 항해에선 155명이나 초과해서 탑승시켰던 것이다.

브룩스호는 유명하긴 하지만, 예외적인 사례는 아니다. 다른 배의 묘사도에서도 비슷한 증거들이 발견된다.



프랑스의 노예선 Vigilante 그림
©Schomburg Center for Research in Black Culture


©Wilberforce House, Hull Museums


2007년 영국 더럼대학교(Durham University)에선 노예제 폐지 200주년을 맞아 노예 무역선 브룩스를 재현하는 행사를 진행하기도 했다.

©Durham University


Brookes 다음으로, 어쩌면 그보다 악명으로는 더 유명할지도 모를 노예 무역선은 Zong호이다.


Zong호는 1780년 건조되어 역시 리버풀에 등록된 노예 무역선이다. 크기는 다른 배들보다 작은 약 110톤. 1781년 9월 6일, 442명의 아프리카인들과 선원 17명 포함 459명을 실은 Zong호는 노예 해안, 지금의 가나 남부 해안을 떠나 자메이카로 향했다. 하지만 459명이란 숫자는 Zong호가 감당할 수 없는 인원수였다. 영국 법에서 정하는 기준에서 Zong호는 오직 193명만을 실을 수 있는 사이즈였다. 과적에다가 항로를 잘못들어 여정이 지체된 이들은 선내 물 부족과 아프리칸들의 반란에 겁을 먹고선 132명의 아프리카인들을 세번에 걸쳐 바다에 던져버렸다. 노예선들은 보통 보험에 들어있었는데, 그 조건들이 마치 가축에 대한 보험과 비슷하다. 만약 노예로 팔려가던 사람들이 배에서 죽거나 자살하는 경우엔 보험처리가 안되고, 위급한 상황에서 바다에 빠져 죽은 사람들에 대해선 보험금 청구가 가능했었다. 선장 Luke Collingwood는 물을 아끼고, 자메이카에 갔을때 '시장성있는' 노예들을 살리기 위해 아프리카인들을 죽이도록 명령했다고 한다. (Walvin 2011, 2013)

J. M. W. Turner의 그림 The Slave Ship. Zong 호와 어떤 연관인지는 모르겠지만,
Zong 호 사건과 비슷한 느낌의 그림이다.
© Museum of Fine Arts, Boston
Zong 호의 소유주는 이 일이 있고난 이후, 보험사에 아프리카인들의 사망에 대한 보험금을 청구했으나 보험사는 지급을 거부했고, 결국 법정에서 Zong 호의 선주와 보험사는 공방을 벌인다. 재판장 맨스필드 백작은 이 사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의심의 여지 없이 이 노예에 관한 사건은 말이 바다에 던져진것과 같은 사안이다". 사람들이 죽었지만, 법정에서 그 누구도 살인이나 도덕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보험사와 선주는 '과실'이나 '의도성'에 대한 것으로 공방을 벌였다. 결국 재판은 고의적인 화물 파손의 관점에서 보험사가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아도 된다는 판결로 끝이난다. (Walvin 2011, 2013) 법정에서조차 아프리칸들은 인간취급을 받지 못했지만, 이 법적 공방이 남긴 상세한 자료들은, 이후 노예제 폐지운동에 많은 도움이 된다.



영국에서는 1807년 노예 무역 폐지법이 통과되었고, 1833년 노예제가 폐지되었다.
미국에선 1808년 노예 수입이 금지되었고, 1863년 링컨 대통령이 노예 해방을 선언했다.




국제연맹은 1926년 조약에서 노예에 대해 이렇게 정의한다.
"소유권 행사에 관련되는 권한의 일부 혹은 전부의 지배를 받는 사람의 지위 또는 상황이다." 
"the status or condition of a person over whom any or all of the powers attaching to the right of ownership are exercised" (League of Nations, Convention to Suppress the Slave Trade and Slavery, 1926년) 

소유권이라고만 되어 있지만, 자기 자신에 대한 소유권으로 이해하면, 노예가 무엇인지 이해하기 쉬워진다.


얼마전, 현대기아차의 부품사, 유성기업의 노동자가 자살했다. 유성기업은 2011년 노동자들이 야간근무 폐지를 요구하자 이들을 폭력적으로 진압하고 직장을 폐쇄했던 기업이다. 당시 해고당했던 노동자들은 법원판결을 받아 복직되었지만, 회사는 이들을 계속해서 괴롭혔고, 노동자들과 자본의 싸움은 5년째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올해 초. 한광호씨가 자살했다. 

사람이 죽고, 많은 사람들이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고 있지만, 유성기업과 현대기아차는 회사의 피해액을 따지며 이들을 어떻게 억압하고, 몰아낼지만 궁리하고 있다. 



인간의 비인간성은 항상 상상 이상이다.



<참고서적>

League of Nations, Convention to Suppress the Slave Trade and Slavery, 25 September 1926, 60 LNTS 253, Registered No. 1414
Walvin, J. (2013). Crossings. London, GB: Reaktion Books
Walvin, J. (2011). Zong : A Massacre, the Law and the End of Slavery. USA: Yale University Press

댓글 쓰기

다음 이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