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완다 학살 22주년, 기억의 정치.

4월 7일. 르완다 학살 22주기. 진실을 둘러싼 갈등, 그리고 기억의 정치.

키갈리의 Gisozi 기념관. 생존자들이 기부한 사진들.  ⓒRadu Sigheti/Reuters


르완다는 타이완보다도 작은 나라지만, 르완다 학살로 전 세계인들에게 유명해졌다. 르완다 사태는 20여년 전 100일 남짓 이어진 일이지만, 아직 그 역사는 생생하게 살아있다. 영상과 사진도 많고, 그 학살의 악몽에 시달리는 생존자들도 있고, 학살과 그 이후를 연구하는 학자들도 많으며, 그 유명한 할리우드 영화 '호텔 르완다'도 있다.



르완다 학살의 씨앗은 벨기에 식민통치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후투(Hutu)와 투치(Tutsi)의 역사적 관계에 대해선 학자들마다 약간씩 의견이 다르긴 하지만, 전통적으로는 원한관계는 아니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심지어는 아예 후투와 투치가 외지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민족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만들어진 민족'을 주장하는 편에 따르면 원래 르완다와 부룬디에 살던 사람들 사이엔 후투와 투치같은것은 없었다. 하지만 벨기에의 식민지배가 시작되면서 같이 들어온 선교사들이 이 지역 사람들의 얼굴에 미묘하게 다른점이 있음을 발견했고 후투와 투치라는 구분을 만들었다. 식민지배자들에겐 이런 식의 '분리하여 지배하기(Divide and Rule)'의 전략이 유용했기 때문에, 소수지만, 유럽인과 조금 더 닮은 투치가 더 우월하다며 그들에게 권력을 주고 식민지배의 도구로 이용하였다. 하지만 식민지배가 끝난 이후, 소수의 투치 지배는 다수 후투의 저항을 낳았고, 오랜기간 내전을 겪고, 결국은 1994년 르완다 학살에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다시말하자면, 이성적이고 정치적인 목적에 따라 '재 부족화 (retribalization)'가 이루어졌고, 이것이 두고두고 갈등의 원동력이 되어온 것이다. 부족이나 민족분쟁이라는게 단순히 야만적인 행동인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벨기에 식민지배 시기의 신분증. 민족을 표시하는 부분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벨기에 식민정부는 투치를 우대하고 후치를 차별하여 르완다를 효과적으로 지배하려고 했다. 출처:http://wojciechpiestrak.pl/



22년전 오늘, 1994년 4월 7일, 후투(Hutu)족으로 구성된 정부군과 이들의 지원을 받아 무장한 일부 후투 민간인들이 투치(Tutsi)족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학살이 시작되기 전날까지만 해도, 르완다의 대통령은 쥬베날 하뱌리마나(Juvénal Habyarimana)였다. 군인출신이자, 후투족인 그는 1973년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이후 1994년, 학살이 일어나기 바로 전날까지 르완다의 대통령직을 맡고 있었다. 4월 6일 정상회담에서 복귀하던 하뱌리마나 대통령은 그가 탄 비행기가 격추당하면서 즉사한다. 폴 카가메 정부는 이 비행기 폭파가 제노사이드를 일으키기 위한 후투 극단주의자들의 소행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대통령 비행기 격추는 르완다 학살의 신호탄 같았다. 바로 다음날부터 시작된 학살은 100일 동안 이어졌고, 적게는 50만, 많게는 100만명까지 사망한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이는 투치 인구의 70%가, 르완다 전체 인구의 20%가 이 학살에서 사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후투가 투치를 학살'했기 때문에 이 사건은 후투의 투치에 대한 '제노사이드' (인종학살) 라고 불린다. 르완다 사회에서 이와 다른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은 '제노사이드 거부자 (Genocide Denier)'라고 불리며 비난받는다. 나도 르완다 학살이 '민족'을 겨냥하여 조직적으로 이루어진 제노사이드라는 묘사에는 큰 이견이 없다. 하지만, 제노사이드는 큰 그림의 일부로 볼 때 정당하다. 여기엔 분명히 다른 이야기도 있다. 있어야 하고, 이야기되어야 한다. 단 하나의 이야기가 마치 불가침의 영역처럼 이야기되는 것은 현 르완다 대통령 폴 카가메(Paul Kagame)에게 너무나 많은 면죄부와 권력을 준다.


개인적으로 르완다에 갈 기회가 없어서 르완다 사람들이 폴 카가메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외부에서 언론을 통해 접하는 카가메는 대체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인물으로 보인다. 많은 언론에서 카가메를 '끔직한 학살에서 르완다를 구해내고, 성공적인 경제정책을 통해 르완다의 근대화 현대화를 이끈 지도자'로 묘사하고 있다. 물론 그의 권위주의적 행태를 지적하긴 하지만, 르완다 같이 끔찍한 갈등을 겪은 나라에서 그정도는 허용되지 않느냐는 분위기인 것 같다.

일명 '제노사이드 거부자'들은 그렇게 많아보이진 않는다. 르완다에서의 학술연구나 취재가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기 때문이기도 하고, 국제 정치가 카가메 정부에 호의적이기 때문이기도 하다(대표적인 인물들이 빌 클린턴과 토니 블레어다). 특히 1994년 학살에 대해선 카가메 정부가 민감해 하고 있기 때문에, 비판적 연구나 취재가 쉽지않다. 비판적인 연구를 하는 학자들은 르완다 정부에게서 위협을 느꼈다고 이야기한다. 그럼에도 주로 이런 쪽의 이야기는 학계에서 이루어졌고, 최근 BBC가 관련 내용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방영하면서 대중에게도 알려지기 시작했다.


미시간 대학교의 크리스티안 대븐포트(Christian Davenport)는 1994년의 사건이 '제노사이드'로는 아주 잘 알려져있지만, 내전의 성격이 있었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알져지지 않았다고 이야기한다. 그는 이 사건을 우간다에서 국경을 넘어 침공한 '르완다 애국 전선' (RPF, Rwandan Patriotic Front)과 르완다 정부 사이의 내전이라는 큰 맥락 속에 제노사이드가 있었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카가메와 RPF가 내전을 멈추게 했다는 이야기에도 반론을 제기한다. 지역별로 학살이 일어난 시기를 조사해보니, RPF가 도착하기 전에 대부분의 지역들에선 학살이 끝나있었다는 자료를 근거로 제시한다.

이 사건을 내전으로 이해한다면, 왜 이 기간동안 후투족도 살해당했는지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이 학살동안 르완다 정부군과 인트라함웨(Interahamwe, 정부군의 지원 아래 학살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후투족들)는 '온건한' 후투족들도 살해했다는 증거와 카가메의 RPF가 르완다에 들어오고서부터 후투족에 대해 보복학살을 자행했다는 증거들도 발견되었다. RPF는 인트라함웨 뿐 아니라 난리통을 피해 이웃나라로 도망가던 무고한 후투들도 살해했다. 여기에 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상태에서 개인적인 원한이나 다른 이유들로 살인을 저지른 사례들도 있어 이 사건의 복잡성을 더한다. 이 모든 것들을 제노사이드라는 틀에는 담을 수가 없다.


이 사건을 제노사이드가 아닌 내전으로 보는 것은 중요하다. 제노사이드는 일방적이다. 제노사이드라면 후투 가해자들이 처벌을 받고, 사죄를 해야 한다. 투치는 단지 희생자 남는다. 만약 이 사건을 내전으로 이해한다면? 상황은 많이 달라진다. 쌍방에 책임을 물을 수 있게 되고, 더 많은 퍼즐조각으로 역사적 기억을 재구성 해볼 수 있게 된다. 이 점에서 폴 카가메가 이 사건을 제노사이드로 규정하고, 교육하고, 기념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내전이라면, 폴 카가메도 학살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격추된 대통령기 잔해 ⓒ BBC

앞서 대통령 비행기 격추에 대해 이야기했다. 학살의 방아쇠라고 불리는 이 비행기 격추에서 사망한 사람은 당시 르완다 대통령이었던 하뱌리마나, 부룬디 대통령 시프리앙 은타랴미라 (Cyprien Ntaryamira), 그리고 프랑스인 파일럿 등이다. 이중 프랑스인 파일럿의 딸이 1997년, 이 격추에 대한 조사를 프랑스법원에 접수하면서, 프랑스 사법부는 이 사건을 다시 조사하였다. 프랑스 사법부의 첫번째 보고서는 엄청난 논란을 불러일으킨다. 이 폭파를 주도한 세력이 폴 카가메의 RPF라고 결론 내렸기 때문이다. 이 보고서는 주로 증언에 기반하고 있었다. 하지만 담당 판사가 바뀌고 새롭게 나온 보고서에서는 다시 반대의 주장을 내놓는다. 몇몇 증인들은 증언을 철회했고, 다시 후투 극단주의자들의 소행이라고 주장했다. 여전히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카가메의 폭파 개입을 증언하는 RPF의 전 장군. ⓒBBC

망명중인 RPF 고위 관련자들이 카가메가 비행기 격추를 계획했고, 격추를 위한 미사일 반입에 개입했다고 증언한 영상이 2014년의 BBC 다큐멘터리 담겨있다. 사실 프랑스는 학살 이전 후투 정부와 특수관계에 있었던 나라이기 때문에, 외교적인 측면에서 이들의 보고서가 사실만을 담고 있다고 이야기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같은 나라에서 아무리 담당판사가 다르다곤 하지만, 사건에 대해 완전히 상반되는 판결을 내렸다는 것은 더 생각해볼 여지를 제공한다.

르완다 학살 사태를 사법적으로 다루었던 곳은 또 잇다. 르완다 사건에 대한 국제 형사재판소가 탄자니아에 있었다. 1994년, UN 안전보장위원회의 결의안에 따라 설립된 이 재판소는 후투 가해자들을 주로 다루어왔다. 2000년대에 들어 스위스 국적의 검사 Carla Del Ponte가 이 재판소의 검사로 임명되고서, RPF의 가해 사례를 조사하기 시작했는데, 이에 카가메는 진노하였고, 그녀는 '정치적인 이유'로 해임되었다. 2015년 말 활동을 종료하기까지 이 형사재판소는 93명을 기소하여, 61명에게 유죄를 선고하였다. 61명 모두 후투였다.


BBC에선 2014년 'Rwanda's Untold Story'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를 방송했다. RPF입장에서는 전형적인 '제노사이드 거부자' 내러티브라고 부를만한 내용들을 가득 담았다. 이 다큐멘터리는 RPF가 르완다와 콩고민주공화국(당시엔 자이르)에서 후투족들을 학살했고, 하뱌리마나 대통령기를 격추한것도 RPF이며, 투치 사망자의 숫자가 과장되었다고 주장했다. RPF가 국경을 넘어 도주한 인트라함웨를 격멸한다는 이유로 자이르를 침공했고, 이 과정에서 많은 후투족이 살해당했다. 앞서 말했듯 대통령기 격추도 여전히 논란중이다. 다큐멘터리를 보고있으면 폴 카가메가 악마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그래서 조심스럽다. 굉장이 편향된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설령 사실일지라도) 모두 사실로 받아들이지는 않아야겠다,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기서 제기한 내용들은 '의혹'으로 가치가 충분하기 때문에, 더 공개적이고 체계적인 역사적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폴 카가메는 그런 연구를 거부하고 있다.




카가메가 잘 하고 있는 것도 많다. 경제성장도 이루었고, 관료집단의 부정부패도 적고, 교육, 보건, 여성인권 등도 잘 보장되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권위주의적인 정치 스타일과, 인권 탄압, 불평등 증가, 후투에 대한 차별 등에 대한 비판도 있다. 무엇보다도, 과거에대한 연구와 비판적 의견들을 탄압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마치 시한폭탄을 안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카가메가 하는 것은 "과거사에 대한 기억의 정치"라고 부르고 싶다. 아픈 기억들을 이용해 결속과 단결을 강조하며 시민권을 제한하고, 한쪽의 일방적인 이야기만을 '진실'이라며 강요하며 자신의 권력을 정당화하고 있다. 이런 정치는 우리에게도 어딘가 친근하다.





자료
Davenport, C. and Stam, A. (2009) What Really Happened in Rwanda? Miller-McCune.
http://faculty.virginia.edu/visc/Stam-VISC.pdf
Davenport, C. and Stam, A. (2009) Rwandan Political Violence in Space and Time.
Reyntjens, F. (2013) Political Governance in Post-Genocide Rwanda. Cambridge University Press.
BBC (2014) Rwanda's Untold Story Documentary. Document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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