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숙 작가. 이 작가의 소설 중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이다. 어머니가 좋아하셔서 '달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막 출판되었을 때, 선물해 드린적도 있다. 이번 표절논란에 놀랐다. 하지만 신경숙 작가의 소설들을 어머니도, 나도 좋아하기에, 신경숙 작가 조리돌리기에 지금껏 손가락 하나 담지 않았다. 나는 작가도, 학자도 아니지만, 글을 쓰며 크게 느낀 것이 있다. 글쓰기는 너무 어렵다는 것이다. <대학의 위선>(데버러 로드)이라는 책에 소개된 워너 브레이스의 소설 <The Department, 학부>에서 학자는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더 큰 리그에서 경쟁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동료 학자만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 칸트 등 불멸의 세계적 석학들과 경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학자들은 철학적, 문화적 거장들과 일상적으로 마주친다.'라고 묘사하는데, '학자'를 '소설가'로 바꾸고 '아리스토텔레스, 칸트 등'을 위대한 작가들의 이름으로 바꾸면, 신경숙 작가의 표절을 이해하려고 시도해 볼 수 있을 것도 같다. 이미 읽어보았던 글들을 넘어서는 '나만의 글'을 쓰지 못할때, 이 맥락에서 그 작가의 그 문구보다 더 좋은 '나의 문구'를 만들지 못할 때, 그 고통은 상당했을 것이고, 손쉬운 방법에 대한 유혹도 그만큼 크게 다가왔을 것이다.
유혹에 빠질 때, 되뇌는 말이 있다. "내 것이 아니다." 거짓이나 작은 노력으로 얻은 상대적으로 큰 명성이나, 우연히 얻어걸린 이득, 말하긴 어렵지만 여튼 내 것이라 명명백백히 자랑할 수 없는 모든 것들에 '내 것이 아닌 것'이라는 딱지를 붙인다. 이렇게 하면 남들에 비해 덜 빛나보이게 되고, 걸음이 느려지지만, 길게 보면, 진짜 '내 것'들을 쌓아나가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이 원칙을 고수하려 애쓰고 있다.
신경숙 작가는 표절의 논란이 된 <우국>이라는 소설을 모른다고 했다. 진짜 모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남의 것을 '내 것'으로 가져다 쓰고, 그 것을 반복해서 이용하면 진짜 내 것 처럼 보일 때가 있다. 신경숙 작가는 이번 사건에서 '내 것'들에 집착하지 말고 차분히 자신의 글을, 자신의 명성을 돌아보고, 자신의 것이 아닌 모든 것들을 내려놓는 모습을 보여주면 좋겠다. 예술가는 정신적으로 섬세한 사람이지 결코 강한사람이 아니다. 그렇게 흔들리고 잘못했음에도 계속 글을 쓴다면, 신경숙 작가의 글을 계속 읽어볼만 할 것이다.
신경숙 작가에 대해 날선 비판을 가하는 사람들도, 자신이 쓰는 글이 기존 주장의 반복이 아닌지, 그냥 똑같은 이야기를 자신의 이름으로 한번 더 반복하는 것이 아닌지 고민해 보았음 한다. 요즘 모든 이슈에 너무나 많은 이들이 이야기 한다. 표현의 자유가 있다지만, '나도 꼭 이 이야길 해야만 하는가', '내가 이 이슈에 글을 보태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미 알려진 글들과 비교해 내 글이 어떤 가치를 지니는가' 등등은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다.
앞서 말했듯, 나에겐 원칙이 있고, 그 원칙을 지키려 애쓰지만, 가끔 블로그에 더 많은 사람들이 왔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인기를 끌만한, 그리고 쉽게 쓸 수 있는 글을 쓰기도 했고, 크게 가치없는 글을 쓰기도 했다. 이번 신경숙 작가와 논란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보며, 다시 한 번 내 원칙에 대해 돌아보았다. 더 글쓰기가 어려워 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