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wibuka 23 - 제노사이드 23주기 추모기간





4월 7일부터 100일간, 르완다 정부의 공식 표현에 따르자면 "투치에 대한 제노사이드"를 추모하는 기간 Kwibuka가 이어진다. Kwibuka는 키냐르완다어로 "기억하다"라는 의미이고, 1994년 4월 7일부터 100일동안 학살이 이어졌기 때문에 그 기간을 100일로 정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집중 추모기간이라고 할 수 있는 처음 일주일 동안은, 오후에 일하는 것이 금지되고 대신 각종 추모 행사나 생존자 증언이나 제노사이드 이데올로기(제노사이드를 다시 일으킬 만한, 어떤 분열적인 형태의 생각들)에 반대하자는 내용의 토론으로 구성되는 지역 모임이 진행된다.

나는 외국인이라 이 기간동안 조용히 지내야지 싶었는데, 내 직장이 지역사회 내에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기 때문에, 4월 7일 디스트릭트가 주관하는 추모행사에 참석하게 되었다.

섹터 오피스 앞, 조기가 걸려있다.


한국으로 치면 새마을금고 혹은 지역 농협에 해당하는 SACCO에 걸린 Kwibuka 현수막

우기인데 요 며칠 비가 안온다 싶었는데, 이날은 하루종일 비가 왔다 갔다 했다. 내가 일하는 지역에서 태어나서 지금껏 살고 있는 우리 직원은, 제노사이드가 시작되던 그날도, 그리고 매해 4월 7일에는 이렇게 비가 온다고 했다.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23년 전 이날을 경험한 사람들에겐 날씨가 어떻든 우울한 날일 것 같다. 

각 지역에는 제노사이트 추모 장소가 있는데, 내가 일하는 냐루바카에는 제노사이드 당시 아이들이 많이 학살당했다고 한다. 그래서 추모 행사의 시작은 그 아이들의 추모비를 방문하는 것 부터 시작한다고 했는데, 내가 비를 피하느라 늦게 출발해서 추모비를 지나 추모행사장소로 이동하는 행렬에 동참해야 했다.  추모행사 장소는 인근에 있는 언덕 위 큰 공터였다. 

시장의 추모연설

나는 파트너 기관의 기관장(?) 이었기 때문에, 우리 직원들과 함께 천막 아래로 안내 받았고, 각종 공무원 및 지역 유지들을 제외한 다른 시민들은 야외에, 때때로 비를 맞으며 서 있었다. 행사는 연설과, 연설과, 또 연설과, 연설과 묵념으로 이어졌고, 지켜보던 한 시민은 오열을 토해 주변인들의 부축을 받아 행사장을 빠져나가기도 했다. 그렇게 박수 한번 없이 날씨만큼이나 가라앉은 추모행사 동안, 부끄럽게도 키냐르완다어를 너무 못해서 연설들을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던 나는 1994년도의 일에 대해서 생각했다. 어떻게 그런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그 기억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추모행사의 마지막은 참 이상했다. 행사의 마지막은 다같이 라디오를 듣는 것이었다. 아프리카연합 의장의 프랑스어 연설이 끝나고, 마침내 대통령의 연설이 시작되었다. 행사 내내 오락가락하던 비는 작심한듯 퍼붓기 시작했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대통령의 연설은 키냐르완다어에서 어느새 영어로 바뀌었다. 대통령은 1994년 이날 시작된 일에 대한 여러가지 논란이 있다며, 특히 용어에 있어서 '투치에 대한 제노사이드'외의 표현은 넌센스라고 잠꼬대처럼 반복했다. 그리고 그 동안 국민들은 비를 맞으며, 대다수는 알아듣지도 못하는 영어를 들으며 그렇게 서 있었다. 나는 그 모든 과정을 가진 자들과 함께, 천막 아래서 방관했다. 르완다에 오기 전엔 '감히' 그 학살에 대해서 글들을 많이 썼었고, 지금은 말하기 어려워졌지만, 여전히 나는 물음표이고, 어제의 행사는 부끄러운 마음이 든다. 




Kwibuka23, 무엇을 기억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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