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르완다의 기억: 카가메와 '수정주의자들'의 기억 전쟁.

르완다 폴 카가메 정권의 정통성 (Legitimacy)에 관한 에세이를 쓰면서 2008년 책 'After Genocide: Transitional Justice, Post-Conflict Reconstruction and Reconciliation in Rwanda and Beyond (Phil Clark과 Zachary D. Kaufman 편저)'라는 책을 좀 들여다보았다. 이 책의 서문은 재미있게도 르완다 대통령 폴 카가메가 썼다. 이 서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투치(Tutsi)들을 지구상에서 전멸시키려는 시도 끝에 백만명이 살해당한 사건, 르완다 제노사이드 이후의 시간들은 많은 자기성찰과 재건을 위한 시간이었다.  (xxi) 


카가메가 제노사이드를 해석하는 방법은 이렇게 명쾌하다. '후투(Hutu) 극단주의자들이 투치들을 학살한 인종학살 사건.' 그런 그도 이 과정에서 온건한 후투 사람들이 인종학살에 반대하다가 희생당했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에게 후투 사람들의 희생은 부수적인 것에 불과한듯 이내 다시 그의 견고한 제노사이드 이야기로 돌아온다.

하지만, 분명히 가해자들의 목표는 모든 투치 민족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나는 누구든 이 극악무도한 범죄를 부추긴 이들 모두에게 정의의 심판이 있길 희망한다. (xxii) 
내가 항상 하는 이야기지만, 중요한건 1994년 한편에서는 정부의 무기들을 재량껏 사용하는 가해자들에 의해 이뤄진 제노사이드가 있었고, 다른 편에는 RPA (Rwandan Patriotic Army, 르완다 내전기간 카가메가 이끈 반군)가 제노사이드를 멈추기 위해 싸웠었다는 것이다. (xxiv)
르완다 제노사이드에서 후투 사람들의 피해은 부수적으로 볼 만큼 작은 것이었을까? 카가메가 서문을 쓴 바로 그 책의 한 부분을 쓴 르마르샹(René Lemarchand. 'The Politics of Memory in Post-Genocide Rwanda)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같은 투치라도, 같은 후투라도, 그들내에서 다른 기억을, 혹은 잊혀진 기억을 가지고 있다. 일단, 운좋은 사람들이 있다. 대부분은 투치인데, 후투 젊은이들에게 친구들이, 이웃들이, 가족들이 살해당하는 것을 눈앞에서 목격했지만, 생존한 이들이 다. 그리고 카가메의 난민 전사들, 인코탄니 (Inkotanyi)가 있다. 그들은 '해방'을 위해 수백만의 후투 민간인들을 살해했다. 전 RPA 망명자의 증언에 따르면, 적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에게 가차없이 끔찍한 고문을 가하기도 했다.
피를 뒤집어쓴 후투 집단학살자 (Genocidaires)도 있다. 그리고 자신의 투치 이웃을 구하기 위해 죽음의 위협을 무릅썼거나, 실제로 살해당한 후투 영웅들도 있다. 게다가 셀수없이 많은 후투들이 르완다와 동부 자이르(지금은 콩고민주공화국)에서 카가메의 부대가 냉혹하게 사람들을 살해하는 것을 목격했다. 이 모든 사람들이, 어느정도는 기억의 기능장애와 감정적 트라우마를 겪고 있다. (67)
다마스 무테진타레 (Damas Mutezintare)는 그의 고아원에 있던 투치 어린이 300명과 성인 80명, 약 400명의 생명을 살린 후투 사람이다. 그는 La Libre Belgique의 특파원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는 특별한 것을 하지 않았어요. 단지 뭔가 해야한다고만 생각했어요. 결과가 어떻게 될 수 있었을지는 잘 몰랐지만.. 저는 운이 좋았죠." 그와 같은 많은 영웅들이 있었지만,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만큼 운이 따라주진 않았다. (70) (아래는 무테진타레 증언 영상)

  


르마르샹처럼, 단 하나의 제노사이드에 도전하는 이들을 카가메는 '수정주의자 (revisionist)'라고 부른다. 카가메는 최근 몇몇 사람들과 집단들이 역사를 수정해서 자신들의 이익을 얻으려 하고 있고, 그들 중에는 1994년에 르완다에서 일어난 제노사이드를 완전히 부정하는 이들도 있다며 이 현상을 우려하고 있다.  이런식으로 1994년 사건에 대해 다양한 해석을 시도하는 이들에게 카가메는 투치에 대한 제노사이드만이 정치적으로도 법적으로도 인정된 것이라고 못박는다.

정치적으로는 UN이 탄자니아 아루샤에 르완다에 대한 국제 범죄 재판소를 세우기로 결의한 결의안 995호가 통과될 때 인정되었고, 법적으로는 국제 범죄 재판소의 사건 'The prosecutor vs. Edward Karemera'에서 항소부가 이 법정의 모든 피고인은 제노사이드에 관련되었는지 논하는 것이지, 제노사이드가 르완다에 있었는지 논하지 않는다고 판결할때 인정되었다. (xxiii)

카가메는 제노사이드를 거부하는 이들보다 더 심한이들이 있다며, 그들은 심지어 '제노사이드를 멈춘 장본인'인 RPF가 후투 민족을 말살하려 했다는 혐의를 씌고 있는데, 이건 완전 말도안되는 소리라고 주장한다.

1990년 이후의 내전과 제노사이드 기간동안 일부 통제를 벗어난 PRF 인원들이 민간인에 대한 범죄를 저지르긴 했지만, 그들은 당시 PRF의 내부 절차에 따라 엄벌에 처해졌다. 일부 RPF 인원들의 일탈행위와 제노사이드 범죄를 도덕적으로 동일시하려는 시도는 도덕적 파탄이며, 르완다 사람들, 특히 제노사이드 생존자들에 대한 모욕이다. 객관적인 역사는 이런 수정주의의 타락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실제로 제노사이드 이후 기간동안 대규모 보복은 없다는 것은 르완다의 지도자들이 몇몇 사람들이 주장하는 그런 것보다 훨씬 높은 도덕적 목표를 향해 적극적으로 사람들을 이끌었다는 것을 명백히 증명하고 있다. (xxiii)
카가메는 이렇게 RPF와 PRF의 리더인 자신의 도덕적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다. 카가메는 같은 책에 실린 르네 르마르샹 글도 읽었는듯, 르마르샹의 글을 비판하며, 후투와 투치 민족구분이 제국주의의 잔재라는 주장을 한다.

르마르샹의 글의 전제는 오해에 기반하고 있다. 후투/투치의 구분을 르완다 민족 문제 전제로 돌릴수 없다. 오히려 이런 구분은 정치적 목적에 의해 왜곡과 선입관을 낳아왔다. 이런 왜곡과선입관은 제국주의 세력에 의해 시작되었고, 후기 식민정권에 의해 유지되었으며, 1994년 제노사이드를 조장하는데 이용되었다. 
르마르샹은 모든 르완다의 문제를 민족 프리즘으로만 보려하는데, 이는 르완다인을 하나로 묶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게다가 르마르샹이 주장하는 후투 민족에 대한 국제적인 범죄화가 있었다는 것도 옳지 않다. 제노사이드는 대낮에 벌어졌다. 사람들은 제노사이드에서 누가 유죄고, 누가 무죄인지 알고 있다. (xxiii)

르마르샹처럼 제노사이드에 대해 비판적으로 접근하는 학자들은 꽤 많다. 2004년, 르완다와 부룬디를 오가며 오랫동안 일했고, 두 나라에 대한 저서들도 낸 적이 있는 헬무트 스트리젝 (Helmut Strizek)은 2004년 1994년의 학살은 계획된 것이 아니라며, 은연중에 제노사이드의 존재를 부정했고, 노트르담대 교수로, 르완다에서 현지 연구를 진행했던 크리스티안 데븐포트 (Christian Davenport)는 사실 더 많은 희생자를 낸 쪽은 투치가 아닌 후투라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그는 알려진 사망자들의 대다수가 투치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당시의 투치 인구가 많지 않았고, 살해자들은 자신이 죽이는 상대가 누구인지 상관조차 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지금은 뒤집어졌지만, 한때 프랑스의 재판부는 제노사이드의 시작을 알린 대통령기 추락사건의 배후가 카가메였다고 판결하기도 했다. 언급한 사람들 외에도 카가메의 제노사이드 네러티브에 의문을 제기하는 학자들, 언론인들이 꽤 많다.

누가 사실을 말하고 있는지를 떠나서, 이 기억을 둘러싼 전쟁은 카가메에게 아주 중요하다. 카가메의 말을 빌리자면 모든 르완다 사람들은 '제노사이드 생존자이거나, 가해자이거나, 생존자나 가해자의 친구이거나 가족이다.' 모든 르완다 사람들은 제노사이드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고, 이 기억은 현재를 이해하는 기반이 된다. 즉 1994년을 어떻게 이해하느냐가 현 정권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기반이 된다. (지난달, 르완다 학살 22주기에 맞춰 이와 관련된 글을 썼었다. 르완다 학살 22주년, 기억의 정치.)

만약 소위 말하는 '수정주의자'들의 말처럼 카가메의 RPF가 양민들을 학살했고, 하뱌리마나 대통령의 비행기를 추락시켰고, 제노사이드가 사실은 없었다면, 아니 이 주장들 중 하나만 사실이라도 (혹은 사실이라고 르완다 사람들이 받아들인다면) 카가메는 모든 정통성을 잃고 독재자, 범죄자로 불리기 시작할 것이다.

지금까지는 카가메가 그의 정통성을 잘 지켜오고 있는 것 같다. 그의 독재적인 정치에도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선거와 개헌투표에서 그에게 지지를 보내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사람들의 마음속에 생생한 역사를 이런식으로 덮어둔다면 1994년 사태의 상처는 결코 아물지 않을 것이고, 언젠간 터지게 될 것이다.

키갈리의 Gisozi 기념관. 생존자들이 기부한 사진들.  ⓒRadu Sigheti/Reuters


르완다에서 일어나는 일은 자연스럽게 우리나라의 일을 떠오르게 한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논란, '제국의 위안부' 논란이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같은 사람들이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대해선 다양한 목소리를 강조하고, '제국의 위안부'에 대해선 하나의 역사를 강조하고 있다. 우리도 역사가 비판적으로 다루어지지 않을 때,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 신중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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